독특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은, 실은 허상에 불가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김상현 전한인회장은 필자도 오래전부터 알고있었다.
처음 그를 본 적은, 1980년 우리 가족이 아르헨티나에서
처음으로 집을 매입해 공증을 위해 찾아갔을 때였다.
당시 우리 가족이 운영하던 작은 식품점에 동생이 계란을 공급해주고 있었기에 대강은 알고있었다.
그 뒤로 가끔 만난 적이 있지만 깊은 대화는 나눈 적이 없었다.

그는 인터뷰를 위해 한인회 사무실에 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1965년 파라과이로 이민 온 때부터 시작해서 아르헨티나로 재 이주, 종사했던 직업,
당시에 김회장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 그리고 김회장이 도움을 줬던 사람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정말 놀랐던 점은,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 직업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것과
당시 월급 액수, 장사할 때의 매출액 등의 숫자를 언급한 것이다.
무려 59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처럼 말하는 그를 보면서 감탄하다가,
인터뷰할 때 녹음하려고 준비했던 일을 잊어버렸다.

– 형제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 저희가 9남매입니다.
    옛날 치고도 많은 편입니다.
    저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고,
    집안의 기둥이셨던 할머니는 1973년 가족을 초청할 때 함께 초청했지만,
    당신이 오시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같이 가셔야 한다고 하는 논의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1974년도와 1975년도애 걸쳐서 남은 가족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저희가 대가족이라 총 18명이었습니다.

김회장은 말하는 도중에 할머니를 언급할 때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존경하며, 지혜로운 분이라고 말했다.
그가 부모님과 형제들 초청을 이야기할 때는 책임감도 함께 묻어나왔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옛모습을 갖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환경과 공간 그리고 생활방식이 모조리 바뀐 지금도 그는
책임감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현재의 한국에서는 사라진 모습을, 이민 59년 된 79세의 인물에게서 볼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민은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 불과 20세에 오셨는데,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 곡절이 많았습니다.
    공부하러 서울로 올라와서, 16살부터 이민협회에서 급사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이민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고, 나중에는 꼭 이민 가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족이민 만 허용하였기에 브라질로 이민 가시는 분에게 부탁해서
    그분의 양자로 호적에 올렸는데, 그분의 가족이 이민을 안 가게 되어 다시 파양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1965년 아시는 아주머니가 파라과이로 이민 간다고 해서, 그분에게 부탁해
    양자로 올려달라고 청했고 승락을 받았습니다.
    묘하게 그때 법이 바뀌어 단독이민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수속은 제가 이민협회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되었습니다.
    파라과이에 1965년 6월에 도착했습니다.

-파라과이에는 얼마나 계셨나요 ?

  • 4개월 정도 있었습니다.
    이민 가서 이민사회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계셨던 한성욱 목사님을 알게 됐습니다.
    그분이 소개해서 시장에 있는 일본인 도매상에 취직했고,
    그곳에서 일하면서 한인 교포들에게 쌀과 채소 등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출이 상당했습니다.

당시 김상현은 20살의 청년이었다.
59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때 받은 월급, 매출액 등의 숫자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화 도중에 많았다, 적었다 같은 추상적인 표현 대신 숫자로 말했다.

-아르헨티나는 어떻게 오셨나요 ?

  • 파라과이에서 강상태라는 분이 아르헨티나 행을 권유했습니다.
    당신이 병아리 감별하는데,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서, 일자리와 병아리 감별 기술도
    가르쳐준다면서 같이 가자고 해서 아르헨티나로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민 온 1976년도 그리고 그 뒤까지 병아리 감별하시는 교포들이 계셨습니다.

  • 제가 제일 먼저 시작했습니다.
    6개월 연수 후에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한시간에 800마리 정도 감별했을 때, 저는 1000마리 이상을 했고,
    경험이 많은 그들의 정확도가 90%가 조금 넘었을 때, 저는 98-99%의 정확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루과이 일본인 양계장의 초청을 받아 일하러 가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거의 100% 정확한 감별을 해냈습니다.

김상현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깡패라는 별명을 가진 아르헨티나인 직원과 싸운 일도 들려주었다.
직원들 사이에 대장 노릇하던 그가 김상현을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면서 얕보아서 마찰이 생겼는데,
퇴근하는 김상현을 밖에서 기다리다가 싸움이 붙었는데, 그를 뻗게 만들었다.
다음날 회사에서 쫒겨날 줄 알고 출근했는데, 사장이 그를 부르더니 “잘했다” 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민사회에서는 온건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에 누구 와도 다투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제 소신이 교민들과는 다투지 않는다 입니다.
    먼 이국 땅에서 같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갈 동포들 아닙니까 ?
    교민사회에서 깡패라고 소문난 사람들과도 일을 같이 할 때도 싸운 일이 없었습니다.
    대화와 선의 그리고 베품으로 달래면서 함께 했습니다.

-1993년 4월 사태는 김상현이라는 인물이 교민사회에서 얼마나 귀중한 사람이었는지 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지금 와서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 교민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사태는 훨씬 심각했습니다.
    눈사태처럼 언론보도는 커져만 갔고, 우리 모두는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사태에 집중했고, 그리고 묘책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메넴 대통령과는 대통령되기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고,
    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에르난 곤살레스 (당시 국방장관)과는 아주 친했습니다.
    저는 곤살레스를 찾아가 “나를 형제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이 사태를 꼭 해결해달라 ” 고 했습니다.
    곤살레스는, 자신이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고,
    저는 “하루가 다르게 매스컴에 한인 관련 뉴스가 넘쳐나니 이것을 좀 막아달라,
    특히 방송국의 영상은 확산효과가 너무 크니 반드시 막아 주기를 부탁한다 ” 고 말했습니다.
    곤살레스는 껄껄 웃으면서 “형제가 급하기는 급했군, 한번도 우리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는데” 라면서 “걱정 마 형제여, 내가 책임지고 막아줄께” 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다음날부터 사태가 매스컴에서 사라졌습니다.

사진설명 : 에르난 곤잘레스(당시 국방장관)와 김상현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큰 사건이었는데 김회장님이 정부 최고위직 분과 형제라고 부를 정도의 친분이 사태 해결에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 제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셨고, 제가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교민들이 개고기 식용 문제로 매스컴에 보도됐을 때도, 똑같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개고기 식용’ 사건이 일어나자, 저는 즉시 에르난 곤살레스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저는 그들과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었고, 언제든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곤살레스에게 설명했습니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처럼 소가 많은 나라가 아니어서, 옛날부터 아픈 사람들의 원기회복을 위해서
    개를 식용으로 먹는 문화를 갖고있다” 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날로 개고기 식용 보도가 매스컴에서 사라졌습니다.
    결코 제 자랑이 아닙니다.
    저는 저를 위해서 혹은 제 핏줄을 위한 청탁을 단 한번도 그들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을 위한 일이라면, 해결될 때까지 찾아갔으며,
    해결된다면 기꺼이 머리까지 조아리고, 무릎도 꿇을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그때 비제가스에 사시던 장로님 가족이 영주권 문제로 추방령을 받아
    며칠 이내로 출국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이민청장을 찾아가 만났는데,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추방령은 자신 뿐만 아니라 내무장관도 함께 서명했기 때문에, 자신의 서명을 취소해도
    추방령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무장관을 만났는데, 장관은 저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미 서명한 것을 취소할 법적인 근거는 없다. 유일한 방법은 대통령의 사면령 뿐이다”
    저는 에르난 곤살레스와 메넴 대통령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께서 그 장로님의 단 한가족을 위한 사면령을 내려 주셨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그때는 제 자신도 스스로 자랑스러워졌습니다.
    저는 이렇게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정말 기쁩니다.
    제가 살아온 모든 과정에서 남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진설명 : 메넴 전대통령과 김상현

위에 자주 언급되는 에르난 곤살레스는 메넴 정부 (1989 ~ 1999년)의 실세였다.
그는 메넴과 같은 라 리오하 주 출신으로 중앙은행장, 국방장관, 경제장관, 보건사회부장관을 역임했다.
그리고 ‘4월 사태’ 당시 김상현은 재아상공인회 회장이었다.
(이 재아상공인회는 현재의 아르헨티나 한인상공인연합회와는 다른 단체이다.
재아상공인회는 7대 윤성필 회장 이후 부채 승계 문제로 후임 회장이 취임을 거부해 자동 해체되었다)

이 ‘4월 사태’ 에 대해 ‘한인이민 50년사’에서는 1993년과 1994년으로 혼동해 사용하고 있다.
김상현회장에게 확인한 바 1993년 일어난 사태였다.
50년사 139쪽에 이 사태에 대해 17대 한인회는 속수무책이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16대 한인회 (회장 이흥철) 때의 일이었다.

따라서 50년사 389쪽부터 따로 서술된 ‘4월 사태’ 의 발생 년도는 1993년으로 수정해야 한다.
사진 설명에서 김상현 한인회장은 재아상공인회 회장으로 바로잡는다.
당시 교민사회에서는 이흥철 한인회장이 뻬론당원이고, 1991년 있었던 메넴 대통령배 체육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이흥철 당시 체육회장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4월 사태’를 해결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50년사를 집필한 장영철은 이런 사실을 파악해 16대 한인회가 속수무책이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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