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이기은(한인회 문화부회장)

백구의 까라보보 길에서 노인회관까지 걸어가는 길은 쓸쓸했다.
8월초 아직은 겨울이라 날씨가 쌀쌀한 탓도 있겠지만,
주말이 되면 북적이던 백구는, 해가 넘어가는 장터와 같은 모습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도 토요일 오후에 백구로 나왔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노인회관에 도착해, 2층으로 올라갔다.
한 10분 정도가 모여서, 장기도 두고, 그날이 파리 올림픽 폐막일이라 TV를 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방에 들어가, 덩치 큰 사내와 마주 앉았다.
이민와서 모든것을 이룬 이 남자는 큰 키에, 언제나 그렇듯 얼굴에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젊음 시절 아가씨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인물을 가지고 있는 이 사나이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요즘 근황이 궁금합니다.
* 건강이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큰 문제는 없고, 아직도 자동차 운전을 하고 다닙니다.
오후에는 대부분 노인회관에 나와 있습니다.

– 내년이면 구순이신데, 아직 운전을 하세요?
* 하하!
우리 애들도 이제 그만 운전하라고 성화지만, 막상 관두려하니,
사는 것이 산 것같이 않게 느껴져서 아직 운전하고 다닙니다.

최범철회장이 남미 중앙일보를 창간하고 (1991년), 1년 뒤에 필자가 신문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직원들 사이에서 최회장이 운전하는 차에 동승한 뒤로는,
다시는 타지 않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필자도 그중에 한사람이었다.
한번은 낮에, 한번은 밤이었다.
그래도 낮에는 좀 덜했는데, 밤에는 차에서 내리니 등에서 땀이 났다.
최회장은 당시 BMW를 타고 다녔는데, 순간 속도가 빠른 차를 얼마나 빨리 운전하던지
옆에서 말은 못하고 쫄아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했더니, 한사람이 기도는 필수라고 해서 웃었던 기억도 있다.

– 교민사회를 위해서 하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민 50주년사”에서도 많이 기술되어 있지만 더하실 말씀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전에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 내려놓았습니다.
별로 덧붙일 말은 없지만, 한인회관 이전을 위해 착수금 (seña)까지 걸었던, 건물매입을
백구 상인들의 반대로 못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그때 좀더 설득하고 대화를 통해 방안을 찾지 못한 점이 후회됩니다.
누구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자책하게 만듭니다.

“이민 50주년사”에도 이민 역사에 두고두고 교민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지금 차까부꼬 (Chacabuco) 앞에 있는, 현재 꼬또 (coto) 슈퍼마켓 건물로 25만 달러에
매입하기로 하고, 착수금을 걸었다. 건물은 전면 50m의 4층이다.
최범철의 개인 돈으로 걸었던 착수금은 3년 뒤에 돌려받았다.

– 하지만 한인묘원 조성사업은, 전세계 한인 이민사에 남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조금 전 어두웠던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 한인묘원 조성사업은, 지금도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1989년 7월 Arco de Paz 공원묘지회사가 대사관을 통해서 제안한 일을 수락하고,
수차례 협의를 거치서 시작한 사업을 3년 뒤 1992년 11월 사업을 완료했습니다.
제가 한인회장을 연임하면서, 교민들을 위한 일을 제대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묘원사업에서 부족한 설비를 위해, 나중에 사비를 들여,
비석과 홍살문, 안내판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면, 제가 1996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는데,
그때는 재아언론인협회장으로 추천된 것입니다.
제 개인이 아니라, 전세계 한인 이민사에 기록될 한인묘원 조성사업으로
한국정부가 반드시 묘지관리위원회나 한인회에 대한 표창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인묘원 조성사업과 한인회관 건물 매입 실패로 이전 무산에 대해서는
“이민 50주년사” 433~440쪽에 자세히 나와있다.
최범철이 한인묘원 사업에 얼마나 애착이 있었는지는, 그가 묘지 완공 16년 뒤인 2008년
사비 2만 달러를 들여 설비를 완성한 일에서 알수있다.

– 현재 “한인의 날” 모태가 되는 사업도 시작하셨습니다.
* 1989년 추석에 “민속의 날” 이라는 이름으로, 나문꾸라 공원을 빌려서 처음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한인의 날”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날짜도 바뀌고 이름도 바뀌었지만, 아직 행사를 가지고 있고,
후배 한인회장들이 날로 발전시켜 가고 있어 기쁩니다.

– 올해 (2024년) 7월 초에 한인회에 조건 없이 1만 달러를 기부하셨습니다.
* 금년 말에 있을 “한인의 날” 행사와 내년 “이민 60주년 준비위원회” 가
발족되는 것을 보면서, 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디에 사용할지는 현 한인회가 알아서 잘하시리라 믿고 조건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센떼나리오 공원 (Parque Centenario)에서 개최한다고 들었는데,
더 발전해 나가는 것 같아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습니다.

– 한국학교 완공위원회장도 하셨습니다.
* 1995년 한국학교가 개교했지만, 마지막 공사가 지지부진하자,
완공위원회를 결성해 저와 10분의 위원들을 선정했습니다.
저희들은 단 6개월 만에 나머지 공사를 완료하고, 해산했습니다.

최범철은 손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중앙일보사에서 일할 때, 건물에 손 볼일이 생기면,
사람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그가 다 고쳤다.
사실은 대단히 부지런해서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부품을 사와서 미리 고쳤다.

– 남미 중앙일보를 창간하시고, 나중에 폐간까지 하셨습니다.
* 사실 맨 처음 접촉한 곳은, 경향신문이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잘 풀리지 않고있을 때, 지인의 소개로 L.A 중앙일보사를 소개받았습니다.
그 중앙일보사 분들은 적극적이고, 많이 도와 주시려고 해서 남미 중앙일보사를 설립했습니다.
신문을 받아 사용하는 댓 가는 월 1천 달러였습니다.
그런데 2012년 폐간 할 때는, L.A 중앙일보사의 사람이 바뀌었는데,
금전적으로 많이 요구하면서 같은 동업자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몇 번 계약 연장을 시도하다가, 아니다 싶어서 접었습니다.

-창간 동기는, 한인회장 당시 언론의 공격, 특히 “주간 우리들” 손정수대표의
비판기사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의 말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최범철은 남미 중앙일보사를 1991년 11월에 창간했다.
그는 당시 한인 회장이었고, 현직 회장이 일간 신문사를 설립한 사실에 대해,
당시 교민사회에서는 말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주간 우리들” 의 손정수가 최회장에게 쓴 비판적인 기사가 발단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민 50주년사” 258쪽, 1991년 11월 최범철이 한인회장 퇴임 이후 신문사를 설립했다,
라는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필자가 중앙일보사에 입사한 때가 1992년 2월이었다.
최범철은 당시 한인 회장이었고, 그의 임기는 1992년 12월에 끝났다.)

-노인회관 건립에도 상당한 기여가 있었습니다.
*1992년 초(3월)에 노인회가 설립되고,
곧 노인회관 건립운동으로 모은 돈 6만 5천 달러로 부지는 매입했지만,
건축비가 없었던 상황에서, 한인묘원 조성 수익금 중 일부인 7만 달러를 지원해서
건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80살이 넘어서 노인회장도 했습니다. (노인회관은 1993년 완공)

-노인회에 대해서도 애착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요즘 오후에는 늘 노인회관에 나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일은, 현재 노인회관 관리비로 연 3,000 달러 정도가 필요합니다.
현재는 몇 분들이 수시로 보태 주셔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떠나고 난 뒤에 가 걱정입니다.
한인회 같은 단체나 혹은 재단에서 맡아서 계속 관리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하신 일도 많았고, 거의 성공했습니다.
그래도 또 하시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자식들이 잘되고 건강하니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지금은 거의 다 내려놓고 삽니다.

이 남자가 관여한 일을 보면, 한인묘원, 민속의 날 (현 한인의 날),
한국학교 완공위원회, 남미 중앙일보사 창간, 노인회관 건립 등,
현재 교포사회의 중추가 되는 기관을 망라하고 있다.
이민 와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많지만,
최범철은 여기에 더해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그것도 다 성공시킨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대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최회장은 나를 배웅하러 2층에서 아래층으로 같이 내려왔다.
그는 계단 옆의 난간을 짚고 천천히 걸었다.
덩치 뿐만 아니라, 업적도 거인같은 사내에게도 세월은 흐르고 있었다.

[약력]

1935년 경기도 고양 출생
1954년 양정고등학교 졸업
1959년 육군 만기 제대
1961년 ~ 1975년 서울시 지방행정서기
1997년 아르헨티나 이민
1988년 ~ 1992년 한인회장
1991년 남미 중앙일보 설립
1993년 평통 아르헨티나 지회장
1995년 평통 남미서부협의회장
1996년 한국학교 건축완공위원회장
2017년 노인회장

[기부]

1991년 한인묘원 조성 10,000 달러
1992년 한국학교 10,000 달러
1993년 한국학교 완공위원회 10,000 달러
2008년 한인묘원 부대시설 20,000 달러
2024년 한인회 10,000 달러

한인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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