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한인 사회의 2세인 Cecilia Kang 영화 감독의 새로운 영화가 Argentina 에서 개봉됩니다.

동 영화는 지난 Mar del Plata 영화제에서 관객 특별상 및 심사 위원 특별상을 받은바 있습니다. 제목은 Partio de mi un barco llevándome, 나에게서 배가 나를 태우고 떠났다” 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2세가 2차 대전 일본 제국이 저지른 위안부 할머니 역사를 듣고는 한국으로 떠나 한국에서 위안부 할머니 관련 역사를 배우는 과정을 타큐 형태로 만들었고 현지에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번 7월4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의 Gaumount 극장에서 오후 9시 영상될 예정이며, 토요일 7월6일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유명 MALBA 라틴 아메리카 예술 박물관의 극장에서 상영됩니다. 많은 한인들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동 영화 관련 금일 현지 유력지 Infobae 에 큰 기사가 실렸습니다.

다음은 Infobae 에 실린 기사를 번역해서 올립니다..

*위안부 이름 아래 행해진 일
“휴식의 여인”이나 ” 기쁨의 여인”은 스페인어로 번역되지만 야만성을 감추는 단어이다.
이것은 영어의 “편안한 여인”에서 온것이다.
사실 이 용어는 거짓말과 야만성을 감추는 단어이다.
피해자들과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성노예”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좋은 일자리를 거짓 약속하는 일본군에 납치되거나 속았는지는 알수없다.
이런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길이 없다.
그러나 중국 통계에서는 50,000~200,000명, 일부 학자들은 400,000명으로 추정한다.
내년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80년이 된다.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 소수의 피해자들은 일본이 행한 피해에 대한 책임과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소녀들의 절반은 한국인이었고, 중국인이 30% 나머지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 그리고 식민지에서 태어난 일부 유럽인들도 있었다.
일본의 이러한 행위의 시작은 군인들을 성병에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군이 “위안소”라는 완곡한 표현을 붙인 곳에 끌려간 소녀들은 성매매 여성들과 함께 일했다.
그들 중 일부는 12살이었고, 하루에 수십명의 군인들을 받아들여 야했다.
강간, 구타, 고문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여인들은 삶에서 멈추지 않는 트라우마를 겪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을 헤쳐나가 가정을 꾸렸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비밀을 간직한채 혼자 사는 것을 선택했다.
이 여성들 중 많은 수가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군의관들이 접종한 수은 과다로 불임 상태였는데,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병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전쟁 말기에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미군이 있었고, 일부 역사가들은 1970년대에 이에대해 언급했지만, 희생자들은 1990년대 초에 겨우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의 고령여성 16명이 일본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면서 알려졌다.
이후 1993년 정식으로 논의와 합의가 있었고, 1년 뒤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총리가 용서를 구하는 담화가 있었다.
2001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인정했지만, 다음 정부들은 이 사실을 외면하고 피해를 인정하는 것을 중단했다.
실제로 수정주의 총리였던 아베 신조 총리 (2006~2007, 2012~2020 재임 2022년 피살)는 이른바 “위안부”는 군인들과 성관계를 강요받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부정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녀들은 성매매를 통해 돈을 벌려는 여성들 이었다고 강변했다.
이는 일본 학계의 두 전문가도 최근 저서에서 같은 주장을 하고있다.
그들은 “위안부”의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며, 수년전 지배적인 페미니즘 물결에 대응해,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현재의 극우적 경황과 일치한다.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학교 교수와 일본대학 교수인 제이슨 모건은 “위안부 사기극”이란 책에서, 가짜 회고록, 북한 간첩이라고 주장하면서 젊은 여성들이 속임수 때문에 “위안소”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이런 모습은 일본의 허가된 성매매 제도하에서 위안부는 국가가 인정하는 성매매 여성에 해당된다고 주장해온 일본 우익의 목소리와 동반한다.
허가된 성매매 여성을 이야기할 때 여성들이 사창가 주인과 계약을 맺고, 공개적으로 영업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주장들은 1993년 이후 일본에서 등장하여, 2019년 출간된 “항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통해 심각하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2021년에는 위에 언급한 램지어 하버드대학교 교수를 학술회의에서 배제시키는 반향까지 일어났다.
호사카 유지 한일 양국 관계, 한국 전문가는 2021년부터 디플로맷 (Diplomat)에 기고한 글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합의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부인했다. 그는 램지어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단언했다.
공인된 성매매 제도 하에서는 포주와 여성이 여성의 최소한 권리를 보호하기도 위해 계약을 작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남한의 위안부 경우에는 그러한 계약의 증거가 없다. 이는 램지어 교수도 “계약을 찾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위안부는 일본의 공인된 성매매 여성처럼 행동했다는 주장을 반박할 다른 증거도 있다.
호사카 유지는 “아무 문서도 없이 가난한 농민의 딸들을 인신매매하듯 사들여 일을 시키고 노예처럼 부렸다”고, 1983년 출간된 일본 군의관의 “전쟁 일기”를 인용했다.
이 증언은 위안부가 성노예였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수요집회
한국에서는 1992년부터 인신매매 피해자 중에서 생존한 사람들과 가족 그리고 인권단체들이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생존자들은 고령의 여성들이기 때문에 한국어로 다정하게 “할머니” 라고 불린다.
나는 이 영화의 여배우인 멜라니에 정에게 고문, 비난, 경멸을 겪은 여성들의 주장에서, 그녀에게 인상적인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서울의 한 박물관에서 열린 위안부 사진 전시회에서 전쟁과 여성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내가 연기한 황금주 할머니가 “김치” 하면서 찍은 사진이 인상 깊었다.
나는 할머니를 방문했고, “위안부” 삶의 특수성과 어떻게 그녀와 같은 사람이 겪어야 했던 잔혹 행위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에 반성하게 되었다.
8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의 일상에서 “위안부” 같은 여성들이 수치심이나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고, 성폭행을 신고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우리는 그들처럼 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매일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딸인 세실리아 강감독 (비디오 게임, 자전거 그리고 나의 마지막 실패 감독)은 2013년 한국 방문 시, 성 노예 생존자 중 가장 적극적으로 실상을 알려왔던 김복동의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그녀는 15살에 다른 여성 30여명과 함께 선택하지 않은 목적지로 향한 항해에 대해 말했다.
김할머니는 반복되는 강간에 대한 고통,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는 고통 그리고 전쟁 뒤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위축시켰던 수치심도 언급했다.
김복동은 2019년 1월 별세했는데, 나는 2015년 4월 서울에서 그녀와 인터뷰를 했었다.
김과 함께한 날은 토요일 정오였다.
봄이 한창이었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녀가 사는 곳은 복잡함과 거리가 있었다.
나는 예은 통역인과 함께 갔는데, 우리가 받은 주소를 쉽게 찾지 못했다. 여기저기 물어서 간신히 찾아내는 그런 동네였다.
김복동은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걸어왔고, 우리 둘은 그녀가 바닥에 앉은 것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작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그녀는 90세의 아주 작은 체구의 노파였다.
흰머리였고 평상복 차림으로 가끔씩 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그녀가 겪은 일에 대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손을 올리기도 했고, 가끔은 탄식도 했다.
김씨는 한국을 점령한 일본군에게 집에서 끌려갔을 때 14살이었다.
그녀는 다른 지역의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공장에서 일할 것이라고 들었다.
일본군영에 도착한 그녀는 8년 동안 성노예로 일했고,
그 기간 동안 가족과의 연락은 없었다.
다른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김씨도 일본 당국의 진심 어린 강력한 사과를 기다리다 숨을 거뒀다.
서두에 썼듯이 공식적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런 참상을 겪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문서는 없다.
일부 역사가들이 수집한 증언과 전해진 작은 이야기들이 남아있지만, 우리는 수천명의 학대 받은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이른바 “위안소 “에서 소녀들은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구타와 고문도 당했다.
일본이 패전하고 전쟁이 끝난 후, 1970년대에 미군이 이 주제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했다.
90년대에 16명의 피해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이런 오래된 인신매매에 대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맨 처음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바닥에 앉아있는 다섯명의 여자라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김씨는 천장을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를 속였다. 우리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집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공장에서 일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거짓이었고, 우리를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한국이나 일본 등 모든 곳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일본군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젊은 처녀들을 연행했다.
그들은 우리를 일본군 군복을 바느질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 우리를 위협하면서, 그들과 같이 가지 않으면 국외로 추방할 것이라고 겁을 줬다.
일본 군인들의 군복을 꿰매는 일이 나쁜 것인가 ? 만약 추방당하면 죽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종했다.
우리는 군인들이 가는 곳에 항상 동행했고, 그들의 막사에서 같이 살았다.

*보물
40년대 동양문화에서 10대들은 보물 같은 존재였고, 겸손했으며 사적인 행동은 공개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시 처녀성은 여성의 정직성과 존엄성을 사회적으로 결정하는 핵심 문제였다.
김씨의 8년 간 삶은 악몽이었지만, 전쟁이 끝나도 나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옥에서 돌아온 그녀와 동료들은 그들이 겪은 일을 말할 수 없었다.
수치심과 굴욕과 자존감 상실은 영원히 그들의 몸에 갇혀 있었다.
김씨는 머리를 가로지르며 “군인들이 나에게 한 행동은 묘사할 말이 없다. 우리는 모두 매우 어렸다.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없었다. “고 고통스럽게 말했다.
첫째날은 정오부터 오후 5시까지, 다른 날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날이 저물자 앉아있을 힘도 없었다.
김씨는 살아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독약으로 자살하려 했지만, 약을 못 구해서 다른 한국여성들이 청소용품으로 사용하는 액체를 훔쳐 한잔을 마셨다. 속이 타는 것을 느꼈지만, 한잔을 더 마셨고, 죽을 것 같았을 때, 간호사들이 와서 급히 위세척을 시켰다.
악몽은 계속되었다.
8년 간의 성 노예 고통 끝에 그녀들은 간호사로 일했다.
환자를 돌보고, 주사를 놓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거나, 심지어 헌혈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군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증거를 숨기기 바빴다.
그들은 끝까지 그녀들을 학대했다.
전쟁이 끝났을때, 그녀는 싱가포르에 있었다.
많은 소녀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들의 집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미군 병사들이 우리를 조사한 다음, 석방한 다음 한국으로 보냈다.
가족이 없어 갈 곳이 없는 동료 두명이 나와 함께 부산의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22살이 되어 집에 왔을때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말할수 있겠는가 ?
우리 가족은 내가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가 결혼할 나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할수 없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는 내가 공장에서 일했다고 믿었다.
내가 그들에게 말할때까지.
처음에 그들은 의심하면서, 나를 믿지않았다.
나중에 그들은 나에게 적어도 살아남았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 위로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내 비밀을 말한지 1년 후,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나는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혐오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믿었다.
김씨는 일을 시작했고, 가게를 열었다.
창피함 때문에 결혼은 생각도 못했다.
그때 좋은 남자를 만났고, 남자는 김씨보다 나이가 많았고, 아들이 있는 이혼남이었다.
무슨일이 있었는지 고백했고 결혼했다.
그녀는 아이를 가질수 없었다.
그녀의 동료들도 같은 처지였다.
남편은 몇년전 세상을 떠났다.
굴욕과 학대를 겪은 여성들은 이미 50년 동안 침묵을 유지했고, 그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정부와 대화를 나누면서, 결코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의 사죄를 요구했다.
어느날 텔레비전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에 대해 보도하면서 증인을 구했다.
김씨는 전화를 걸었다.
그 이후로 그녀의 이름은 위안부 문제와 항상 같이 거론된다.
“전세계에 우리의 대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조용히 있을수가 없었다.
우리가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해결책도 기대할수 없다.
그런데 나이가 90이 되니 피곤하고 지친다.
우리는 단지 사죄를 받고 싶을 뿐이다. 돈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것은 아니다”라고 김씨 할머니는 강조했다.
“일본정부가 사과를 표시하고, 우리에게 한 일을 인정하고, 우리의 인권도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국제 토론회의 주제
1990년대 한국인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 이후, 이 문제는 국제 토론회의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특히 일본과 한국, 중국 간의 관계에 뜨거운 감자 중 하나이다.
김씨는 “우리는 1993년 유엔 인권회의에 참석차 빈에 갔을때 전세계 많은 여성들이 우리를 위해 함께 울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한 후 먹지도 자지도 못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잊어려고 노력했던 과거의 끔찍한 순간으로 돌아가게 했다.
나는 아직도 깊은 잠을 자기 힘들다.
우리는 일본에 여러번 갔었는데, 수도 뿐만아니라 시골도 여행했다.
우리는 일본인들에게 우리의 진실을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나라가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조직된 역사를 일본인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라고 성토했다.
무력충돌에 따른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돕는 민간단체 “나비 펀드” 활동가였던 김씨는 “일어난 일은 과거”라고 말했다.
“나비 펀드”의 상징은 노란 나비다.
그녀는 2014년 프란시스꼬 교황에게 그 나비를 선물한 사람 중 한명이다.
그리고 그날 우리가 사진을 찍는 동안, 제 손을 꼭 잡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반대, 여성 폭력 반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여성이 강해져야 한다.”고 김씨는 강조했다.

작별의 시간이다.
여러사람들은 이른바 “위안부”의 옛사진과 이들을 기리는 조각상, 세실리아 강의 “나를 태우고 나에게서 떠나가는 배”의 영화 장면을 담고있다.
영화는 7월 4일부터 12일 까지 Sala Leopoldo Lugones와 7월 매주 토요일 Malba Cine에서 볼수있다.
또 7월 11일부터 17일 까지 꼬르도바의 Hugo de Carril 시립영화관에서도 상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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