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hoto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에서 아르헨티나로 가기 위해선 24시간이 넘는 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보내야 한다. 지난해 8월 부임해 10월 17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전달한 에밀리아노 와이셀피츠(53)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는 “두 국가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며 “잘 몰라서 구체적이지 않은 단어들로 상대국을 표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떠올린 단어 중 하나가 ‘포퓰리즘’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포퓰리즘 대신 ‘재정적 무책임’ ‘경기 침체’ 등의 단어로 인터뷰를 풀어가던 와이셀피츠 대사는 오히려 “한국과 아르헨티나는 비슷한 점이 많다”고 강조했다. 지난 5월 7일 서울 용산구 주한 아르헨티나대사관에서 와이셀피츠 대사를 만났다.
– 한때 세계 5대 부자 나라로 꼽히던 아르헨티나가 심각한 경기 침체에 빠진 이유가 뭔가. “먼저 아르헨티나는 영토가 무척 넓고 자원이 풍부한데 잠재력이 충분히 사용되지 못했다. 또한 아르헨티나는 자원을 수출하는 나라인데 수출 가격이 낮았고 수입하는 품목은 가격이 높다 보니까 무역 관계에서 불리한 측면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제를 둘러싼 정치 관계자들의 합의가 부족했다. 여야가 경제적으로 앞으로 나가기 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번에 당선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정치인들의 ‘재정적 무책임’을 꾸준히 언급했다. 이번 정권은 재정적 무책임에서 벗어나 ‘재정적 밸런스’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큰 과제다.”
열 번째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해 있는 아르헨티나는 전 세계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22차례)로 알려져 있다. 지난 3월 아르헨티나의 연간 물가상승률은 287.9%를 기록했다.
– ‘페론주의’를 내세운 정권에서 경제가 어려웠던 것 아닌가. “특정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존 정당들과 정치인이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선택지로서 밀레이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다. 최근 15년 동안은 어떤 정권이든 상관없이 인플레이션 등 경제적 문제가 있었다. 정치인의 무책임과 무능력이 재정적 밸런스를 이루지 못했고 인플레이션 위에서 매일 싸우는 모습을 보였다. 역사를 살펴보면 아르헨티나가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때가 두 번 있었다.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과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 시기다. 메넴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고,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복지를 선호했지만 모두 경제 성장을 이뤘다.”
– 밀레이 대통령의 개혁 법안이 최근 하원을 통과했는데. “옴니버스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의 정확한 명칭은 ‘아르헨티나인의 자유를 위한 기본법과 출발점 법’이다. 민간의 참여를 높이고 국가의 재정적 비용을 낮추는 내용을 담았다.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신생 정당이고 여소야대 정국이다 보니 몇 개월에 걸친 협상이 이뤄졌다. 국회를 설득하는 데 굉장히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하원이 통과시킨 이유는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을 실현해나가기 위해선 약간의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 한국도 여소야대 상황이다. “정치적으로 한국과 아르헨티나가 비슷한 측면이 있다. 민주화를 이룬 역사가 있고, 큰 양당이 존재한다. 여소야대 정국에선 국민들이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여소야대 정국을 헤쳐 나가는 것이 대통령과 국회 모두에게 큰 도전이다. 56%의 지지율로 당선된 대통령은 반대하는 국회를 상대로 일하는 게, 국회는 국민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밀레이 대통령은 당선 이후 재정 긴축 정책을 펼쳤지만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았다. 선거 공약을 보고 국민들이 뽑았기 때문에 예상을 했던 것이다.”
– 지난 4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중남미 최대 규모의 북한 인권 행사가 열렸다. “아르헨티나는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서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희생자가 많았다. 그 이후로 인권문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민하게 다루고 있다.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정권이든 상관없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정책 중 하나가 인권이다. 북한 인권을 비롯해 전 세계의 인권에 대해선 항상 엄격하게 지키려 한다. 그래서 북한 인권에 대해서도 항상 지켜봤고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 아르헨티나와 한국이 수교한 지 60년이 넘었다. 어떤 분야의 협력이 확대돼야 할까. “양국은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관계다. 아르헨티나는 자원이 풍부하고 땅이 넓지만 인구가 적고, 한국은 자본이 많고 산업과 기술이 발달했으며 인구가 많다. 천연가스, 재생에너지 등 에너지 분야에서 협력할 부분이 많을 것으로 기대한다. 포스코가 아르헨티나에 리튬 관련해서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데 아르헨티나의 국영 에너지회사인 YPF와도 작년에 그린수소 관련해서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지금은 타당성 조사를 진행 중이다. 또한 아르헨티나 바이오 테크놀러지 기업인 ‘비오헤네시스 바고(Biogenesis Bago)’는 한국의 동물 의약품 회사인 FVC와의 조인트벤처를 통해 오송에 구제역 백신 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현재 한국 소와 돼지의 약 70% 정도가 아르헨티나산 구제역 백신을 맞는다.”
– 아르헨티나는 해외 최초로 ‘김치의 날(11월 22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다. “이민자들로 구성된 국가이다 보니 이민자들의 문화를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는 한국 이민자가 굉장히 많다. 이들이 아르헨티나 사회에 기여한 부분을 기리고 김치라는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김치의 날을 제정했다. 막달레나 솔라리 킨타나 상원의원과 한국문화원 주도로 시작됐는데, 상원에서 먼저 통과됐고 작년 7월 하원도 통과하면서 국가 기념일이 됐다. 킨타나 의원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초청으로 지난 4월 한국에 왔는데 아직 안 갔다. 한국과 사랑에 빠져서 쫓아낼 수가 없다.(웃음) 아르헨티나에는 다양한 이민자의 날이 있지만 한국처럼 어떤 음식을 특정해서 만든 경우는 처음이다.”
– 한국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때는 언제인가. “청소년 시절 여동생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카발리토(Caballito)라는 동네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한국인 친구들이 많았다. 여동생이 한국인 친구들과 ‘학교 땡땡이’ 치고 ‘백호’라 불리는 한인타운에 자주 갔다. 지금과 다르게 한인타운은 닫힌 분위기여서 아르헨티나인이 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나는 한인타운에서 노래방이나 식당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한국 음식이 맛있었고, 청소년 시절 개구쟁이 심정으로 더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단골 식당이 있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스페인어를 못하는 척하신다. 한국 대사로 부임하기 전 식당을 찾아 ‘나 어릴 때 그렇게 못 들어오게 했는데 이제 한국 대사로 간다’고 얘기했더니 아주머니께선 ‘그런 적 없다’고 하시더라.”
인터뷰가 끝나가자 와이셀피츠 대사는 “밀레이 대통령은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했다”며 “경제학자였던 밀레이 대통령은 짧은 시간에 큰 경제적 성장을 이룬 한국을 롤모델로 삼고 존경하는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보니 앞으로 양국 간 관계가 강화될 수 있지 않을까”라며 “연말에는 브라질에서 G20 정상회담이, 페루에서 APEC 회담이 있어 윤 대통령이 남미를 순방할 예정인데 이때 윤 대통령 부부가 아르헨티나를 방문한다면 큰 영광일 것 같다”고 강조했다.
김연진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