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 약력
1973년 아르헨티나로 이민
전 중남미 한글학교협의회 회장 4년(2006, 2015~17년)
전 브라질 한글학교연합회 회장 7년(2006, 2014~17년, 2022-23년)
전 나의 꿈 국제재단 브라질 지부장
현 동양 한글학교 교장
현 세계 종이접기 재단 브라질 지부장

내 운명의 끈, 한글학교

브라질 동양 한글학교 교장
김 성 민

나는 브라질 상파울루의 교포 한인교회인 동양선교교회가 운영하는 동양 한글학교의 교장입니다. 어쩌다가 내가 주말 한글학교 교장이 되어 어느덧 22년이란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 일에 매여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2004년 초 당시 출석하던 선교교회에서 주말 한글학교를 시작하기로 하고 제 게 책임을 맡겨서 얼떨결에 시작하기는 하였지만, 중학교를 졸업하던 1973년에 한국을 떠나 온 후 31년 만에 맡게 된 이 일이 내 인생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줄은 몰랐습니다.
장로교 목사님 이셨던 부친의 뒤를 이어 드리지 못한 죄송한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아버지의 힘들었던 목회 생활로 인하여 초등학교를 4번이나 옮겨야 했다며, 목사가 되면 가족을 고생시키니 절대로 목사가 되면 안 된다는 형님의 말에 덩달아 나와 2명의 남동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태어나기를 교회 사택에서 태어나고, 교회에서 성장하고 어느 사이에 어른이 되어버렸고, 일찍이 교회의 장로가 되어, 교회가 맡기는 일이기에 나의 능력과 자격은 돌아볼 겨를도 없이 한글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브라질의 중견 교포교회인 선교교회는 한참 성장하는 교회 이었기에 한글학교 학생이 150명이 넘었고, 교사도 20여 명으로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한글학교 운영에 필요한 재정의 부족함은 교회가 채워주었고, 전도사님들을 비롯하여 온 교회가 합력하여 점심도 제공해 주고 학생들의 등, 하교도 도와주었기 때문에, 직접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닌 학교운영자로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2005년 연합회 총회에서 경험도 미천하고 자격도 없는 나를 회장으로 선출하는 바람에 브라질 한글학교연합회 회장이 되어버렸는데, 더 황당한 것은 바로 1년 전에 발족한 중남미 한글학교협의회가 제1회 중남미 한글학교 합동교사연수회를 브라질에서 개최하면서, 제2회 중남미교사연수도 다시 브라질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는데, 연수 개최 국가의 협의회장이 자동으로 회장이 되는 것으로 되어있어서, 졸지에 중남미 한글 학교협의 회장이 되었고 중남미합동교사연수를 치러야 하는 짐을 떠맡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전 해에 개최된 제1회 교사연수에 참석은 하였지만, 처음 실행한 행사이어서 주변국에서 참석한 사람도 5, 6명 밖에 되지 않는 1박 2일의 간단한 연수였고, 이재호 전임회장이 한 수고를 구경만 하다가 이제는 내가 난생처음으로 국제적인 행사를 치러야 하는 부담감에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해 7월에 한국에서 개최된 2006년 해외 교육지도자 초청연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받아보는 체계적인 교사연수와 함께 제공되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교사연수의 중요함과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한글 교육에 애쓰시는 선생님들과 교류를 하면서 브라질과 남미의 다른 한글학교의 선생님들도 다 이런 연수에 참석할 수 있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1년에 한 번 개최되는 초청교사연수에 남미의 한 국가에서 겨우 2, 3명이 초청을 받게 되는 것이니 대부분 선생님은 한국의 초청연수에 평생 한 번 참석하기도 어려울 것이어서, 이번에 내가 개최해야 하는 중남미합동교사연수를 이렇게 융숭한 대접까지는 못 하더라도 최대한 알차고 풍성한 연수회를 개최하여 한글 교육에 헌신하는 남미의 한글학교 선생님들에게 조국이 내게 해 준 것처럼 한글학교 교사로서의 사명감을 심어주고 격려하며 위로가 되어주는 교사연수를 만들어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재외동포재단의 존재마저도 몰랐던 나는 당시 주상파울루교육원장이셨던 정성천 원장님이 주신 미화 4,000불로 그 큰 행사를 치러야 하였습니다. 교사연수에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강사를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은 하였지만, 재외동포재단이 강사를 보내준다는 것도 몰랐기에 교육원장님의 소개해 주신 이중언어학회의 육효창 교수님을 한국에서 만나 12월 초에 개최될 연수에 강사로 오시겠다는 다짐을 받게 되어 한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연수 개최를 한 달 반 정도 앞두고 육교수님께서 재외동포재단의 경비 후원을 받지 못하게 되어서 오실 수가 없다는 연락을 받게 되자, 정신없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여 브라질과 인근 국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신 분들을 찾는 가운데서 간신히 네 분의 강사를 모실 수 있었고, 2박 3일의 교사 연수를 가까스로 치를 수 있었습니다. 제2회 교사연수의 성공을 기점으로 중남미교사연수가 발전하면서 많은 남미 한글학교 교사들의 재충전 및 화합과 추억의 장으로서의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브라질한글학교연합회장 5년, 중·남미한글학교협의회장 4년을 역임하면서, 내가 개최했던 여러 차례의 합동교사연수를 이러한 심정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중남미한글학교협의회 창립 회원이신 볼리비아의 이안호 선생님과 나는 우리가 회장의 직무를 내려놓더라도, 또 한글학교를 담당하지 않을 때가 되더라도, 남미한글학교 합동교사연수회가 어느 나라에서 개최되든지 꼭 참석하여 남미의 한글학교 선생님들을 격려하자고 다짐을 하였고, 같은 마음으로 초창기 때 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한글교육의 현장에 남아 있으면서 중남미한글학교합동교사연수에 빠짐없이 참석하시는 아르헨티나의 이영주 선생님과, 브라질의 홍현순 선생님등과 매번 반갑게 만나고 있습니다.

남미한글학교 합동교사연수를 개최하려면 나라와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2~3만 불의 비용이 듭니다. 2박 3일, 내지는 3박 4일의 연수 일정과 주변국에서 오는 선생님들이 4, 50명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재외동포재단의 절대 많지 않은 후원금과, 항공료를 자부담하면서도 1인당 100불씩 내는 참가비를 합쳐도 전체 비용의 절반 정도밖에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연수를 개최하는 국가의 회장은 연수프로그램부터 강사 섭외, 호텔예약, 모든 식사계획, 타국에서 참가하는 모든 선생님의 공항 영접부터 배웅까지 모든 것에 빈틈없이 준비해야 하는 것에 더하여 독지가의 후원을 받으러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내가 수년간 남미한글학교협의회 회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르헨티나 청년 시절의 친구인 박기홍 장로는, 지금은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있으면서도 끔찍한 우정으로 이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2015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12회 남미연수에 미화 1,000불을 지원해 주더니, 2017년 칠레에서 개최된 제13회 연수에는 5,000불을 보내주었습니다. 로스엔젤레스 근교의 모빌 홈에 살면서, 그렇게 큰 부자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여유가 없는 것을 잘 아는데, 어떻게 이런 큰 돈을…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박기홍 장로는 40여 년 전 아르헨티나에 처음 한글학교가 생겼을 때 자신도 교사를 했었기에 선배로서 남미 한글학교 교사들을 돕고 싶고, 또한 친구가 회장이라고 하니 어떻게라도 지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지원비를 마련할지를 기도하고 생각하던 중에 자기가 물건을 떼어오는(그의 직업은 커튼 설치업입니다.) 커튼 제작 공장 사장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부탁을 했답니다. 좋은 일을 하고 싶어 그러는데 작년에 팔아 준 것의 120%를 올해에 팔아 주면 5,000불의 커미션을 주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때는 시큰둥하게 여기며, 대답하지 않던 사장이 연말에 부르더니 지난 한 해 동안 열심히 팔아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5,000불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친구는 그 큰돈을 선뜻 내게 내어주며 교사 연수에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나는 이런 고맙고 자랑스러운 친구를 중남미합동교사연수에 참석한 모든 선생님에게 소개하고 싶어 친구에게 비행기 표를 보냈습니다. 고맙게도 그는 시간을 내어 브라질에 왔고, 함께 칠레 연수에 참석하였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고맙고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해에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자기가 기도하던 중에 결심한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향후 10년간 중남미한글학교의 발전을 위해 해마다 5,000불을 보내줄 테니 성민 씨가 마음대로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10년 안에 죽게 되면 맏딸이 이어서 10년을 채우도록 부탁까지 해 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요청하고 싶은 것은 그것을 장학금 형식으로 하되, 1976년도에 아르헨티나에서 첫 한글학교를 시작하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조만호 목사님을 기리는 뜻에서 조만호 장학금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기를 부탁하였습니다. 너무나 귀하고 고마운 친구의 제의라 선뜻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를 믿고 그렇게 귀한 돈을 보내주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 함부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사용해야 잘 사용했다고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중에, 명색이 조만호 장학금이라면 나는 지금 브라질에 살고 있는데, 브라질에서는 조만호 목사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조 목사님이 활동하셨던 아르헨티나에는 조 목사님을 추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아르헨티나에서는 최초로 한글학교를 세우신 분으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으니 이 돈은 아르헨타나에서 사용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후임으로 남미한글학교연합 회장직을 수행한 아르헨티나의 한성익 선생에게 연락하여 박기홍 장로의 뜻을 전하면서 한 선생에게 일임하였고, 한성익 선생은 벌써 6년째 남미한국어교원양성원과 우리말어학당을 운영하면서 한글학교 교사를 양성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재외 한글학교의 전신은 교포교회의 교육부서인 ‘유년주일학교’이었습니다. 최근에는 그렇지 않지만 적어도 50여 년 전인 이민 초창기에는 그렇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한글학교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유년주일학교는 성경말씀과 더불어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서를 심어주고 한국인의 정체성과 문화를 가르치는 한글학교였습니다. 남미 이민 초창기인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 아르헨티나 한인사회에는 오로지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하여 한글학교라는 이름을 걸고 시작한 학교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존재했던 10여 개의 한인교회에는 모두 ‘유년주일학교’가 있어서,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한국어로 성경 말씀과 어린이 찬송가, 한국 동요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 시절의 어린이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을 따라 이민 온 아이들이어서, 모두 한국어를 잘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한글학교를 운영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후반에 들면서부터는 현지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나고 그 수가 점차 늘어남으로써 좀 더 적극적인 한글 교육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연합교회 조만호 목사님 사모님께서 1976년에 처음으로 한글학교를 시작하신 것이 아르헨티나의 첫 한글학교이었고 지금의 아르헨티나 한국학교의 태동이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고 성장한 나도 인력이 부족한 초창기의 이민교회에서 일찍부터 유년주일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매 주일 아침 11시에 시작되는 성인예배 이전인 9시부터 어린이들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분반 공부 시간에는 내가 맡은 반 아이들과 둘러앉아 성경 이야기를 최대한 재미있게 가르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학생 수 만큼의 색지를 과일모양으로 예쁘게 자르고, 예쁜 글씨로 외울 말씀을 하나하나 써서 준비하였다가 주일날 나누어 줄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것이 내게는 제일 기쁜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성탄절을 앞두고 예전에 내가 어린 시절 한국에서 불렀던 것처럼 어린이합창단을 만들어 10곡 가까이 되는 캐럴을 가르쳐서 멋지게 성탄절에 발표해야지 하는 무리한 생각을 하고 어린이합창단을 조직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도록 한 곡도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물렁물렁한 선생이라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고 연습을 시작할 시간이 되어도 모이지 않고 밖에서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성탄절에 찬양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밖으로 나가서 나도 모르게 제일 큰 여학생의 뺨을 때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아이들이 모두 제자리에 가 앉았고, 그 후로부터는 연습이 잘 진행되어 그해 성탄절에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20여 명의 어린이합창단이 10여 곡의 캐럴을 악보를 보지 않고도 찬양하는 역사를 이루어 나와 학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내가 맡은 반 아이들이 성경퀴즈대회나 발표회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부장 선생님께서 3, 4년간 같은 아이들을 계속 가르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들었던 반 아이들과의 정은 세월이 지나면서 다 흩어졌고, 이제는 희미한 옛 추억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환갑이 되던 2018년 7월 어느 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제14회 남미한글학교 합동교사연수 참석차 나는 제2의 고향인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여 3박 4일의 연수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르헨티나 제일교회 한글학교를 담당하고 있는 여선생님이 나를 찾아와서, 김성민 선생님이 맞으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언니가 선생님과 꼭 연락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고 합니다. 언니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김현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년주일학교 교사 시절 유달리 똑똑하고 귀여워서 지금껏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두 명의 여학생, 한 아이는 김현경, 다른 한 아이는 강혜경이었는데 그 김현경이라는 말인가?
세상이 좋아져 카카오톡으로 금방 연결이 되었고 40년 전의 그 아이와 40년 만에 감격의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연결한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라온 아름답고 성숙한 여인의 사진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귀여운 어린아이였던 그 김현경이가 어느덧 52세의 중년여성이 되어있었습니다. 현경이는 UBA 의대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고, 전도사와 결혼하여 지금은 미국 버지니아의 큰 한인교회의 담임목사님의 사모님이 되어있었습니다. 선생이었던 나보다 더 귀한 사람이 되어있었지만, 그때의 추억을 간직하고 깍듯이 선생님, 선생님 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선생님! 그때는 선생님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혜경이랑 경쟁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주일마다 과일 모양의 카드에 성경말씀을 예쁘게 적어서 나누어 주신 것을 오랫동안 모아 두었어요. 선생님의 예쁜 글씨를 흉내 내어 그 덕분에 저도 글씨를 예쁘게 쓰게 되었어요. 선생님이 어린이합창단을 만들어 가르쳐 주셨던 크리스마스 캐럴이 지금도 생각이 나고, 그때의 교회 생활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나는 옛 제자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헛되이 지나갔다고 생각한 지난날이 전혀 헛되지만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내게도 이런 제자가 있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현경이는 자기가 사는 버지니아에 꼭 한번 다녀가시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늙어버린 현재의 모습보다 추억 속의 젊은 선생님으로 남아 있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김현경이가 남미에서 한글학교가 태동하기 그 이전인 교회 유년주일학교를 통하여 아르헨티나에서 맺어진 제자라면, 이유정, 이민솔, 이수희, 이 세 여학생은 내가 브라질에서 한글학교 교장이 된 후에 맺어진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과 달리 요즈음 아이들은 한글학교를 다녔다고 한글학교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여긴다거나, 시간이 지난 후 길에서 만나도 아는 체도 하지 않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리고 브라질의 대부분의 2세 자녀들이 한국어 배우기에 관심이 없어서 부모들의 강요로 몇 년 한글학교에 나오다가 중학교에 진학하면 한글학교에 나오지 않으면서 한국어를 까먹는 상황인데 반하여, 이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꾸준히 한글학교를 다니면서 나의 권유에 따라 한국어 말하기대회, 청소년꿈발표대회 등에 참여하여 한국어 실력이 향상되었고, 한국어 능력시험(TOPIK) 5,6급을 통과하더니, 금년 7월 한국에서 개최된 재외청소년 초청연수에 참석하였다가 연세대 글로벌인재학부에 합격했다는 반가운 소식들을 전해 왔습니다.
청소년이었던 15세 나이에 대한민국을 떠나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52년이란 세월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어느새 인생의 황혼기에 가까워 지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토요일 마다 한글학교에 나와 한글을 배우고, 내가 가르쳐 준 한국 노래를 힘차게 부르고, 즐겁게 뛰어노는 한글학교 학생들을 보는 것이 뒤 늦게 깨달은 작은 나의 행복이고 삶의 보람입니다.

2 thoughts on “[특별기고] 내 운명의 끈, 한글학교 김성민”
  1. 먼저 열심히 일 하시는 모습이 눈에 서합니다.
    도움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하시는일에 응원합니다 .
    건강하세요.👍

  2. 회장님의 일대기가 영화처럼그려집니다~♧♧♧
    이 칼럼을 보시는 분들 모두 헌신의 삶에 대한 감동과 울림을 얻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번 한글학교 포럼에서 반갑게 뵙겠습니다. 늘 건승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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