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에노스아이레스시의 국제도서전시회는 다음주 목요일에 시작된다.
여기에는 특별히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45만명의 여성들이 – 주로 아시안인이었지만 20개국 이상의 나라 출신이며 그중에는 호주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등도 포함되었고 절반은 한국 여성이었다 – 일본 군인들의 성욕 해소를 목적으로 한 위안소에 강제로 끌려와 고통을 받았던, 세계적인 성노예제의 상징인 ‘평화의 소녀’ 동상이 전시될 예정이다.
이 동상은 국내에서 대중에게 전시되는 첫번째 사례이다.
동상은 2022년 배를 타고 도착했지만, 이후 교외의 창고에 보관되었다.
원래는 ESMA (군정 때 무기기술학교, 반대파 사람들을 납치, 고문, 살해했던 장소로 악명이 높았던 곳 )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이었지만, 아직도 여성들을 속임수나 납치해서 데려간 조직적인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전시가 좌절되었다.
강제로 끌려간 여성 중에는 어린 소녀들도 많았다.
이 동상의 전시는 도서전시회 기간 동안 한인사회가 수행할 많은 활동 프로그램 중의 하나이다.
아르헨티나의 한인들은 1965년 13가족이 리오 네그로주의 초엘레 초엘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올해는 한인들이 아르헨티나에 도착한지 60주년이며,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서 독립한지 80주년이 된다.
동상은 한인회 자체 부스인 노란 파빌리온에 전시한다.
이 자리에는 일본 제국주의 성노예로 잡혀있던 여성 중 한명을 중국 땅에서 찾아내 만화로 전세계에 알린 세계적인 만화가 김금석 겐드리가 특별히 참여한다.
아르헨티나에 동상 설치를 위한 발기인 중 한명인 사업가 단떼 최 아르헨티나 한인회장은, 한인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Página 12 신문에 전시회에서 ‘평화의소녀’ 배치는 정치적인 목적은 없다고 강조했다.
“이런 일은 아직도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에게 실제 사건들을 상기시키는 것 뿐입니다. 결코 공식적인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전쟁 중에 여성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잊어서는 안됩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사업가의 가족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그의 아버지는 강제 징집 당해 중국 땅과 일본의 추운 지방인 홋카이도에서 노예 노동을 당했다.
이 여성들의 고통은 당시 다른 인권 침해와 교차한다.
2022년 이 계획을 세운 사람은 최씨였는데, 동상은 ‘5월의 광장 할머니회’ 회원들에 의해 ESMA에 전시될 예정이었다.
최씨는 “2022년 11월 25일 국제여성폭력철폐기념일에 세워질 예정이었고, 동상을 만든 조각가 부부도 한국에서 왔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이는 한국의 인권 투쟁 여행이기도 했다.
그러나 ESMA 박물관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설치 행사 며칠전 연기되었고, 일본의 방해가 있었다.
일본 정부는 당시 알베르또 페르난데스 대통령에게 동상이 설치된다면 지원을 철회하겠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오는 월요일 거의 3년 동안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평화의 소녀’는 작년에 사랑스러운 마팔다 (Mafalda)의 풍성상이 있었던 농업전시장에 설치될 것이다.
정식 전시회는 4월 25일 금요일 오후 6시에 있을 예정이다.
최씨는 Página 12에 “한국계 젊은 아르헨티나인들이 이 이야기를 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감동받고 참여하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도서전시회 한국 부스에서 있을 여러 활동 중 하나는 영화제 수상작인 세실리아 강의 ‘나를 태우고 나에게서 떠나간 배’를 소개한다.
이 영화는 한국인 이민자 딸인 예술계 학생 멜라니에 정이 주연했는데, ‘위안부’라고 불린 여성들의 드라마른 되찾는 역사적 기억과 엮이는 여정이다.
‘위안부’라는 이름은 일본 군대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공포와 악명 높은 행위를 침묵시키기 위해 사용한 완곡한 언어이다.
또 아르헨티나 한국학회가 심사하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 : 현재의 소녀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제로 한 수필 공모전도 있다.
여기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UBA), 라 쁠라따 국립대학교 (UNLP), Austral 대학교 등 7개 대학교 학생들이 참여한다.
‘평화의 소녀’ 동상은 ‘위안부’라고 불린 일본군에게 유린된 여성들을 추모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전에는 잘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최근 몇년동안 많이 알려졌다.
위안부로 끌려온 많은 여성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전쟁의 상처와 수치심 그리고 고문과 트라우마로 인해 그녀들은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나이가 들었고, 삶은 고통 속에 이어갔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 모든 고통을 침묵 속에 묻었다.
그녀들 대부분은 농촌 출신이었고, 이웃이나 친척 혹은 납치되었고, 어떤 경우는 속임수로 데려왔다.
그녀들은 일자리를 줄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위안소’라고 불리는 곳으로 끌려갔다.
‘평화의 소녀’ 동상은 한국의 부부작가인 김서경과 김운성이 디자인했다.
높이는 1.4 미터이고 화강암 바닥은 2×2 미터이다.
동상의 소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 여성들이 입었던 옷을 입은 평범한 소녀로 묘사된다.
소녀상은 맨발로 이는 그녀가 집에 돌아온 후에도 수치심과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 많은 여성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 – 주먹을 쥐고 있는것은 정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나타내고, 어깨의 새는 평화, 자유 그리고 죽은 사람들과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상징한다고 최씨는 설명했다.
바닥의 그림자는 할머니의 실루엣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희망을 품고 살아온 오랜 시간과 정의를 요구하는 것과 소녀들이 할머니가 되었을 때를 상징한다.
소녀의 옆에는 빈의자가 있다.
그것은 관람객들이 옆에 앉아서 이 여성들의 고통에 공감하기 위한 초대의 자리이다.
기억의 재구성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이 첫번째로 참상을 공개 증언하고 격려를 받았다.
그뒤에 중국, 대만, 필리핀에서도 조직이 생겨나고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이 운동은 한국을 넘어서는 사회운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위대한 운동에는 피해자 여성들이 증언하도록 나타나는 일을 장려하는 정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몇몇 역사가와 저널리즘 조사에서 알려져 있었지만, 공개 증언을 위한 용기를 낸 사람을 찾은 적은 없었다.
1992년부터 수십 명의 활동가들이 매주 수요일 서울 주재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의 대응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렸다.
동상은 2011년 처음 설치되었다.
이미 42개 도시에 세워졌고, 그중에는 미국의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독일의 베를린과 드레스덴, 호주와 캐나다에도 있다.
해외에서는 제일 마지막에 설치된 곳은 작년에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섬이다.
동상은 이미 여성들에 대한 성적 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남미에서는 이번 전시가 최초이다.
최씨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도서전시회가 끝난 후, 이 동상이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른다고 언급했다.
정의의 요구에 대한 일본의 입장
일본은 1990년대에 여성들이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끌려갔지만, 성노예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논의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뒤 일본은 ‘성노예’ 단어를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희생자들에게 재정적 보상을 시도했는데, 생존자 단체들은 이 자금이 국가가 아닌 민간부문에서 나왔기 때문에 거부했다.
또 이는 세계적인 협정이 아니었고, 일부 국가들 – 대만, 한국, 네덜란드 -는 양자 협상을 했지만, 자신들의 땅에서 전쟁을 했고,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었던 중국은 협상을 하지않았다.
중국에서는 침묵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몇년동안 각국에서는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 정책이 수립되었지만, 일본은 정책조차 없었다.
한국에서는 피해 여성들이 수년 전부터 연금과 무료 의료서비스를 받을수 있었고, 대만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중국처럼 비공식적인 보상이 더 많았다.
국제전범재판소는 2000년 일본의 전쟁 중 여성 성노예 사건을 위한 재판부를 구성했다.
아르헨티나 까르멘 아르히바이 판사가 주재하고 다른 몇개국 판사들로 이뤄진 재판에서 히로히토 천황 유죄와 일본 정부의 성노예 범죄를 반인륜적으로 간주하고 유죄와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 판결은 구속력이 없었다.
유엔의 인권위원회도 이 사건에 대해 성명을 발표했다.
‘평화의 소녀’ 동상의 존재는 훌륭한 기억의 학습장이 될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