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시의 시민 310만명 중에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이민 온 외국인은 419,000명이다.
이는 아르헨티나 전체에서 주민 수에 비해 가장 많은 13.5%의 외국인이 살고있다.
제일 많은 사람들은 베네수엘라 인이고, 파라과이인과 볼리비아인이 그 뒤를 잇는다.
러플이 달린 흰색 셔츠와 국가를 상징하는 색깔의 긴 치마를 입은 글레니 까스띠죠와 그녀의 댄스 파트너인 미겔 비센테는 파란색과 빨간색 디테일이 돋보이는 흰색 재킷과 밀짚모자를 쓰고 독립기념일을 기념해 준비한 살사와 메렝게 춤으로 도미니카인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그들은 카리브해로 돌아갔다.
보카 지역의 ‘이민자 어머니 성모교회’ 는 도미니카 공화국 독립 18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들의 고국으로부터 6,000km 떨어진 곳에 도미니카 공동체가 선택한 장소였다.
기념일은 2월 27일이지만 이 작은 외국인 공동체 구성원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며칠 뒤인 주말에 모였다.
가장 큰 외국인 공동체는 베네수엘라 사람들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 84,834명이 살고있다.
그 뒤로 파라과이인 64,934명, 볼리비아인 60,108명, 페루인 51,047명이다.
이 네 나라 국적의 이민자들은 유럽 전체 이민자보다 더 많다.
4개국 이민자는 시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60% 이상을 초과한다.
이들은 도시 전역에서 살고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역사의 다른 시기에 이민 온 도미니카, 아르메니아, 방글라데시, 한국과 같은 작은 커뮤니티는 한때 꼰스띠뚜시온, 플로레스 지역과 같은 제한된 지역에서 모여 살았다.
그들은 거주할 뿐만 아니라 교회, 모스크, 학교 등도 설립하면서 일하던 곳이다.
국립통계청 (INDEC)의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1999년까지 108,881명이 이 도시에 도착했다.
2000~2009년까지는 63,862명, 2010~2019년까지는 138,539명이 이민 왔다.
도미니카인 : 즐거움, 음악, 춤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도미니카 민속춤의 안무가인 글레니 까스띠죠는 이들 공동체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 중 한명이다.
그녀는 2015년에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방문하러 왔지만, 아르헨티나를 사랑하고 살기로 했다.
그녀는 “나는 이민자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아르헨티나에서 연합을 봅니다. 사람들은 환영 받고 감사하게 느낍니다. 아르헨티나는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선진국이다”라고 말했다.
인구조사에 따르면 시에 거주하는 도미니카인들은 2,163명이고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은 꼰스띠뚜시온이다.
이 지역에 거의 200명이 살고있다.
또다른 지역은 뽐뻬이에 모여 산다.
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시 문화행사와 라 쁠라따 카니발 행사에 수년동안 참가했고, 그들은 전형적인 도미니카 의상을 입고 행사를 했다.
까스띠죠는 “우리는 미용사와 이발사로 유명하지만 건강 분야에서도 많이 종사하고 있다. 지금은 리니에르스와 플로레스 지역에도 살고있다”고 덧붙였다.
독립기념일 행사는 아르헨티나 주재 도미니카 대사관에 의해 제안되었다.
대사관의 베따니아 페르난데스 영사는 이민 행사 조직을 맡았다.
4년 반 전부터 대사관에 근무한 그녀는, 아르헨티나와 좋은 관계를 강조하면서 “2011년 이전에 아르헨티나는 새로운 이민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여권을 취득하려는 도미니카인들의 이주가 있었다. 게다가 당시 어려운 도미니카 경제 때문에 그들은 친척들에게 돈을 송금할 수 있었다”라고 언급했다.
페르난데스 영사는 재임하는 동안 라틴아메리카 카리브 국가공동체 (CELAC)에서 중요한 일을 했고, 아르헨티나를 다면적인 국가로 보고있었다.
19년 전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 도착한 미겔 비센떼는 “도미니카는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도 만나서 행복과 즐거움의 방법을 찾는 나라입니다. 전파할 가치가 있는 문화이고, 우리의 음악이나 음식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발전을 위해 우리의 역 활을 하려고 노력 합니다 “라고 강조했다.
그는 처음에 수도의 건물이 유럽의 일부 도시와 유사하다는 사실에 놀랐고, 아르헨티나의 문학적, 정치적, 사회적 사고의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보았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아르헨티나 페소는 도미니카 화폐보다 10배의 가치가 있었다. 이 이유로 아르헨티나에 오지만 결국 사랑에 빠진다” 아르헨티나 우체국에서 일하는 44세의 남성은 아르헨티나 여성과 결혼해 13세와 16세의 두 자녀를 두었다.
가장 오래동안 살고 있는 여성 중 한명은 루이사 라모스이다.
그녀는 “1994년에 도착했어요. 우리의 목표는 가족을 돕기 위해서 였습니다. 다양한 일과 사건들이 있었고, 나는 익숙해 졌습니다. 나는 아르헨티나를 사랑합니다. 생활 방식, 교육, 보건 시스템은 훌륭합니다. 아르헨티나인과 결혼해 매우 아르헨티나주의인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 살고있던 친구가 비행기표 값을 빌려줬기 때문에 아르헨티나로 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고생이 많았지만, 아르헨티나 문화와 관습에 적응했다.
라모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시의 도미니카 공동체는 배려심이 많고 명랑하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음악을 듣고, 목소리를 냅니다. 또 서로 돕고 나누며 살고 있습니다 “라고 강조했다.
아르메니아 :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 중 하나
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 중 하나이다.
후안 사라피안 아르메니아 센터의 사무국장의 조부모님은 20세기 초에 아르헨티나에 왔다.
그들을 아르헨티나에 오게 한 것은 평화였다.
아르메니아 땅에서 터키인들은 150만 명의 사람들을 살해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이민을 가고, 더 나은 미래를 추구했다.
친 조부모님들은 아르메니아를 탈출했고, 독일에서 만나 브라질에서 결혼했다.
그들이 아르헨티나로 오기로 한 결정은 아르헨티나에서 더 잘 살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조부모님들의 젊은 시절은 힘들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직장을 얻고 정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정착했다.
반면에 그의 외조부님들은 그들의 가족이 살해되고,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아르메니아에서 결혼 뒤에 20년 동안 살았다.
그러다가 외할아버지가 아르메니아 대학살 중에 죽었다고 생각한 여동생이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민을 올 수 있었다.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는 아르메니아에세 출생한 사람은 607명이다.
이렇게 적은 숫자는 그들이 지난 세기 말에 이민 왔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 아르메니아 교민회에 문의하니 전체 교민 수는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최고 종교 지도자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사도교회 주교인 아렌 샤히니안이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아르메니아 길 1353번지에 있다.
이 교회는 공동체의 핵심이며 매주 일요일 11시부터 13시까지 예배가 있으며, 1938년에 세워졌다.
사라피안은 교회를 세우는데 지역사회의 큰 노력이 있었으며, 그들은 재산의 절반을 기부했다고 설명했다.
샤히니안 주교는 현재 54세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아르메니아 대학살 때 탈출해, 독일로 이주했고, 그는 이후 이탈리아, 영국, 네덜란드에서 살았고, 현재는 사도교회 주교인 카레킨 2세로 사역하고 있다.
그는 “대학살 때문에 1천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국외로 탈출했고, 아르메니아에는 300만 명이 남았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우리 공동체는 매우 큽니다. 지금은 5세나 6세가 때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 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심장 절반은 아르헨티나인 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르메니아 기독교는 가톨릭과 멀지 않다.
주교에 따르면 아르메니아는 서기 301년 이후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다.
그들의 교회는 가톨릭의 개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우리는 가톨릭의 일곱 성찬을 인정하고, 교황을 자매교회 대표로 존경하지만, 우리는 전세계 아르메니아인들의 대표인 총대주교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 공동체의 정신적 지도자들은 구성원들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아르헨티나의 관습 일부를 받아들였다.
주교는 “우리는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하고, 9월 21일을 독립기념일 국경일을 갖고 있다” 고 덧붙였다.
일요일 미사는 14줄의 의자가 있고, 중앙에 공간이 있는 장엄한 교회에서 공동체 전체가 모인다.
돔은 많은 빛이 들어오고 흰색 벽에 반사된다.
맨위에는 아르메니아 여성 합창단과 피아니스트가 앉아있다.
합창단 중에는 20년 전 부에노스아이레스시로 온 알라 아베티시안이 있다.
그녀는 가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시골에서 올라왔다가 아르헨티나 극장에서 안정된 합창단에 들어가기 위한 경연대회를 알게 됐다.
그녀는 참가했고, 우승했다.
현재는 라 쁠라따의 극장 솔리스트이고 서정적인 가수이다.
아르메니아에서는 국립오페라와 발레단의 솔리스뜨로 활동했었다.
이 가수는 아르메니아 공동체와 아르헨티나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본다.
“아르헨티나는 아르메니아처럼 많은 정이 있습니다. 저도 여기서 같은 정을 느꼈습니다. 공동체는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청소년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아르메니아를 알고 그 문화에 대해 더 배우기 위해 20일 동안 아르메니아로 여행을 갑니다. 그들이 전통을 배울 수 있도록 아르메니아 학교가 중요합니다. 일요일 모든 아르메니아인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주중에 일하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고, 가톨릭 신자처럼 교회에서 기도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한국인 : 근면한 사람들, 협동
바호 플로레스 지역의 작은 길 루페르또 고도이 카페에서 77세의 한 여성이 44세의 아들과 말을 하고있다.
김춘숙은 1970년 가족과 다른 50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행기로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우리는 처음에 꼬보 길에서 살았습니다. 한국인은 많지 않았고 스페인어를 몰라서 한국인끼리 모여 살았어요. 하지만 우리가 말을 배우면서 아르헨티나인들과도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시의 한국인들은 아르헨티나 전통도 받아들여 한국적인 관습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지만, 한국문화를 가르쳐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녀는 아들 마이클 강을 쳐다보며 “새로운 세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고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지만, 우리의 문화를 잊어버리게 두지는 않습니다” 라고 강조했다.
그녀의 장남은 브라질에서 태어났지만, 아르헨티나 여성과 결혼해 3명의 자녀가 있다.
마이클은 “우리가 어렸을 때 한국학교가 있었지만,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우리 세대에는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은 정규학교 (ICA)가 있으며 수준도 높습니다” 라고 말했다.
국립통계청 (INDEC)에 따르면 부에노스아이레스시의 한인은 4,558명으로 중국인에 이어 두번째 아시아인 공동체이다.
이들 대부분은 플로레스 지역의 아베쟈네다 대로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한국인 동네 (백구)에 살고있다.
이들 중에는 336명의 북한 출신 한국인들도 있다.
어머니와 아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던 커피점의 주인은 서울에서 17세에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파비아나 장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반 때에 스페인어를 모른 채 왔다.
부모님과 남자 형제와 함께 온 그녀는, 축구 국제심판이었던 아버지 친구의 초청으로 이민왔다.
파비아나 장은 처음에 바호 플로레스의 까밀로 또레 길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나는 아르헨티나가 매우 부유한 나라라는 생각을 가지고 왔지만, 1984년에는 전혀 아니었다. 여기는 마치 한국의 1960대 같았다”고 말했다.
장씨는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인 공동체는 개신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모두 교회에 나가고 있어요. 신앙과 한인들이 만나 대화하고 도움도 요청하기 위해서 입니다. 80년대 당시 한국인들은 새로운 이주민들의 창업을 기꺼이 도왔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여성은 자신을 전통과 언어를 유지하는데 있어 보수적이지만, ‘절대로’ 한국에 돌아가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나는 아르헨티나인이 되었어요. 한국에 가면 길에서 타인처럼 느껴집니다. 한국인들은 차가 와요. 여기가 더 인도적입니다. 한국은 매우 자본주의적인 나라이며 모든 면에서 경쟁이 치열한 사회입니다”라고 말했다.
한인사회에서 눈에 띄는 인물 중 한사람은 아리 조 화백이다.
원래 이름은 조용화인데 스페인어 선생님이 그를 아리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 이후 이름이 되었다.
조씨는 1970년대 말 부모님과 4남매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시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 인민군 출신으로 남한에 정착했다.
부모는 보에도와 리바다비아 지역에 집을 샀고, 온 가족이 창고에서 일했다.
작가에 따르면, 그가 도착했을 때 한인사회는 2,000 가구를 넘지 않았다.
2001년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최대 2만 명에 달했다.
“초기에는 한인사회가 한국문화를 잃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1990년대 정규 한국학교가 설립됐고, 한국병원, 한인골프장, 대학 졸업생들의 모임인 전문인협회가 설립됐습니다”라고 설명했다.
한인사회에 대해서는 “밖에서 보면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이민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위안과 생존의 필요를 위한 것이지 아르헨티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라고 언급했다.
한국문화는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에 영감을 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갔던 여행에서, 정월 대보름날 연날리기를 보고, 6.25 전쟁을 ‘한국의 연’으로 표현하는 주제로 삼기로 했다.
“연이 날 때 줄을 끊고 악이 사라지고 새해에 복을 가져오기를 기원합니다. 아르헨티나 예술가들에게 한국의 전통 연을 주고 그림을 그리고 소원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것은 한국이 평화롭게 통일될 수 있기 위한 기원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유명 예술가들이 그린 전통 연을 거의 80개나 가지고 있습니다”
또다른 인물은 변호사이자 페론주의자 정치인 알레한드로 김이다.
김씨는 부모가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 이주하고, 1년 뒤인 1977년 태어났다.
그는 한인들이 아르헨티나 섬유산업의 35%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앞선 세대의 모든 노력 덕분에 우리가 정착하고, 관여하고, 통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다른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 내의 상호작용과 친밀감을 말해줍니다. 저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는 한국인이라는 점이 그냥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많은 한국인들이 우리가 인종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잘 모릅니다. 오늘날은 정보가 대량으로 제공되면서 동양인을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이지만 5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100% 한국인이며 100% 아르헨티나 인이기도 합니다. 1997년 첫 한국 여행에서는 부모님이 알려준 한국이 1970년대의 한국이라는 것을 깨 달았습니다. 한국에서 우리는 외국인 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고방식과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방글라데시 : 가장 규모가 작은 공동체
지난 인구조사에서 99명이 등록되어 가장 작은 공동체이다.
온세 지역 거주민들은 90%가 등록되었다고 말하지만, 주민들은 더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온 이민자가 있다고 한다.
바르똘로메 미뜨레와 라레아 모퉁이에 위치한 전자부품 가게 주인 미자누르 라흐만은 “제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했을 때 1990년대에 이민 온 15명의 동포들만 있었습니다. 처음 가게를 열 때 그들이 외상으로 물건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물건이 도착하면 나누고, 돈이나 상품 그리고 집도 빌려주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라흐만은 15년 전에 아르헨티나에 왔다.
그는 여기에 오기전에 인도를 거쳐 페루에서 1년이 안되게 살았다.
2010년 말 그는 6개월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시를 방문해 동포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시로 오기로 결정했다.
그는 방글라데시 공동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 사는 250명 이상 등록했다고 밝혔다.
첫번째 이주자는 1995년과 2000년 사이였고, 그후 2007년에서 2010년 사이에 40명이 도착했다.
2018년 이후 팬데믹과 까다로운 절차로 이주자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라흐만과 같은 실헷 지역 출신인 나 압둘 칼람 샤힌은 두바이에서 2년 거주한 후 2012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 왔다.
삼촌이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 살고있었다.
스페인어를 몰랐지만 영어를 사용하면서, 유투브로 스페인어를 배웠다.
샤힌은 크리켓 팀을 구성해 경기를 하려면 더 많은 선수들이 필요하지만, 방글라데시민들은 비자를 받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맨 처음 크리켓을 할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온 젊은 친구가 저를 에세이사 클럽에 데려갔습니다. 그후 선수들이 떠나고 우리도 참가를 중단할 때까지 2년 동안 경기를 했습니다”
또다른 이민자인 바하르는 “우리 공동체는 누군가 아프고, 스페인어를 모를 때, 새로 이주해 왔거나, 떠날 때 서로를 돕습니다. 독립기념일인 2월 21일 같은 국경일에도 모임을 갖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의 형이 운영하는 전자부품 가게에서 일한다.
새로 오는 사람들은 동포들의 가게에서 일을 배운다.
그는 “우리는 생선을 많이 먹지만, 구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방글라데시에서는 존재하는 신분 차별이 없는 이 나라가 존경스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