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이기은 편집인

장소 : 한인회 사무실

– 이민 오셔서 고생도 많았지요 ?

  • 고생은 어렸을 때부터 많이 했어요. 제가 넷째입니다. 집안이 가난해 형님들이 국민학교 마치고 머슴살이 가시고 그랬 어요. 저는 어떻게 하든지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나오면 대통령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함평에 있는 고아원에서 학교를 보내준다고 들어서 고아원을 제 발로 찾아갔어요. 그런데 카톨릭 고아원은 자리가 없어, 기독교 고아원에 들어갔는데, 카톨릭 고아원과는 달리 기독교 고아원은 가난해서 학교에 안 보내줬어요. 식사도 콩나물과 소금물이었고, 저는 일주일에 한번씩 집에 와서 집 밥 먹고, 깨를 볶아서 갖고 갔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는데, 할머니가 이러다 큰일 나겠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와 남들보다 2년 늦게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학년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면서, 2학년 것도 공부하고 하면서, 월반해서 4년 만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서 중학교를 다녔어요 ?

  • 제가 동대문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때는 시험을 보고 들어갔는데, 우리 형제나 학교 선생님들은 떨어질 줄 알았다고 합니다. 입학성적도 좋았습니다. 사실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6학년 때 선생님에게, 집이 가난해서 과외를 하지 못하지만, 저는 서울로 가고 싶으니 선생님께서 더 가르쳐 달라고 졸랐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이쁘게 보셔서 토요일 오후에 과외를 해 주셨습니다. 제가 공부를 잘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할머니는 그런 저에게 항상 힘을 주셨어요. “이 귀여운 새끼, 그런 생각을 어떻게 했어” 라면서 안아 주시고 하셨어요. 노력하다가 보면 해결이 됩니다.

-고등학교도 서울서 하셨나요 ?

  • 제가 이민협회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공부해서, 지금의 고등학교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 오셨어, 결혼도 일찍 하셨습니다.

  • 1969년 4월 19일에 결혼했습니다. 저에게는 부인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집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66년부터 였고요. 그때 집사람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대학교 법대 3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대단하신 것 같아요. 한국에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말도 잘 안통하고, 표현도 힘들었을 때이고, 게다가 처지를 생각하면 결혼까지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 제 일본인 친구가 소개해 줬는데, 처음 만나자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첫 만남부터, 너는 나와 결혼해야 된다고 말했더니 웃었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생각하면 된다고. 꼭 동양여성같이 참하고, 어떤 때는 존경스럽고 그렇습니다.

김상현과 부인

김상현의 1969년 결혼식에 교민 하객이 200명이 넘었다. 당시 1,000명 남짓했던 교민 수를 생각하면, 교포 청년들은 거의다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탈리아 계인 신부 쪽의 하객은 50여명이 참석했다. 김상현에 따르면,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3개국에서 현지인과 결혼은 처음이라고 한다.

-한인회장에 출마하셨던 이유가 있었나요 ?

  • 지금은 고인이 되신 분들이 많아,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지만, 교민사회를 바로잡고 싶어서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당시에 백구에 밀집된 식당들이 보호비를 상납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출마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옆에서 출마하지 말라고 압력도 많았지만, 저는 결심하면 반드시 합니다. 사람들을 모으고, 일하는데 거의 사비를 사용했습니다. 한인회장 2년 동안 지출한 돈이 40-50만불 정도 됩니다. 지금도 큰 돈이지만, 그때의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많았겠지요.

한인회장 출마 포스터

-2018년에 ‘한.아문화경제교류’ 법인을 세우셨지요 ?

  • 그것은 추진하다가 나중에 접었습니다. 추진 중에 제가 어지러워서 쓰러졌고, 혼자서 추진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시작할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교민들이 협조하지 않아 도리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산업공단 분양 사업을 하십니다. 그곳에 입주한 교민 업체가 있나요 ?

  • 현재는 없습니다. 교민들 중에서 입주를 원하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일단 공장 공단이기 때문에 허가 문제도 간단합니다. 임 주하는 업체는 세금과 종업원 월급만 정산하면 나머지 관리 부분에서 신경 쓸 일이 없습니다. 관리비도 그렇게 비싸지 않고, 편하게 공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되어있습니다. 지금은 아들이 직원하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김회장의 전임 이흥철 회장과 인수인계에 대해서도, 당시 교민사회에서 말이 좀 있었습니다.

  • 회계 문제 때문에 제가 감사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에 돈이 다 빠져나갔고, 채무도 있었어요. 결국은 제가 다 해결했습니다. 지금 와서 누가 옳고 그름은 판단하고 싶지 않아요.

-이영수 전 한인회장은 원래 한인사회와 관련이 없었는데, 김회장이 발탁했지요 ?

  • 이영수는 이흥철의 부탁으로, 제가 부회장에 임명했습니다. 한국에 갈 때도 같이 가고 했는데, 실력도 있고 머리도 좋은데 손해를 볼 줄을 몰라요. 나중에 한인 회장할 때 가서 보니, 아르헨티나 사람이 한인회 전화를 받고 있어서, 한국사람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바꾸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한두 번 갔다가 나중에는 가지도 않았습니다.

김상현과의 인터뷰는 필자가 처음 의도한 것에서 멀어졌다. 간단하게 한인회장 재직 때에 미처 ‘이민 50주년사’에 말하지 못했던 것을 듣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이민사” 였고, 그것도 김상현은 지금까지 그때 함께 했던 분들의 이름과 그들과의 거래에서 일어난 수치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지난 60년의 이민생활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 같았다.

-교민들이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분들이 많았지요 ?

  • 김혜숙씨가 무용단을 하시면서 고생이 많아 도와준 적이 있고, ‘아나바다’ 를 하시다 한국으로 가신 이세윤씨가 성당 쪽을 도와줄 때도 힘을 보탰고, 국회에서 전시회를 할 때, 국회에 소개해 전시회를 열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 3번 정도 한 것 같습니다.

-굉장히 친화력이 좋으신 것같습니다.

  • 저는 필요하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만들고, 형과 누나도 만듭니다.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내가 마음을 비우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아껴주면서 살다 보면, 세월이 가는 것입니다.

-이민을 안오셨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

  • 저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다가 이민을 왔습니다. 아마 여기 안 왔으면 야간대학이라도 나왔겠지요.

-한인회장 때에도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요 ?

  • 제가 한인회장 때, 제일 똑똑하신 분들을 추천 받아 같이 일했는데, 여러가지 문제로 홍현신과 김판석에게는 말해서 사표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조치를 취했는데, 제 친구가 홍현신을 다시 추천해서 또다시 같이 일했는데, 역시나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거론하는 것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굉장히 교만해서 주위의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 한인회장을 제대로 할 수 있었는데, 임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비리가 있다는 말도 나오고, 빚도 생기고 해서 씁쓸했습니다. 어쨌든 저하고 같이 일했던 사람인데, 좀 그렇습니다. 지금 최도선 회장이 한인을 위해 일하는 것은, 너무 고마워요. 한인회가 힘든 시기에 그런 분이 나와서 일한다는 게 기적입니다. 그래서 너무 고마워 어머님 장례식에 갔었는데, 너무 늦게 가서 문을 닫았어요. 그래서 다음날 아침 일찍 장의사에 가서 장의사에 가서 조문했습니다.

-올해 돌아가신 주성도 문인협회장의 일도 많이 도와줬다고 들었습니다.

  • 주성도는 문인협회에서 책을 만들 때, 제가 많이 도와줬어요. 또 농업협회 일할 때도 도왔습니다.
    최양부 대사님이 계실 때, 제가 한국의 하림 회장이 오셔서 한달동안 전국을 다닐 때 같이 동행해서 다니고 했습니다. 그가 갑자기 돌아갔을 때, 저는 꼬르도바에서 열리는 말비나스 전쟁 기념식에 초청을 받아서 장례식에는 못 가고, 아들을 찾아가 조의금을 전했습니다. 주성도 하고는 제 자서전 집필까지 논의했는데, 먼저 갔어요.

-김회장님의 살아온 과정이 이민역사이기 때문에 자서전 발간도 좋을 것같습니다.

  • 그렇게 한번 써보는 것도 괜찮겠죠 ?

-호남 향우회 경로잔치도 오랫동안 후원하셨지요 ?

  • 참 오래했는데, 세계호남향우회에서도 자랑할 만한 행사였습니다. 요즘은 이민사회 자체가 축소되니까, 앞으로는 힘들 것 같아요.

-좀 어려운 질문이지만, 한동안 김회장님의 사생활에 대해서, 교민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그는 이 질문에 즉답하지 않았다. 다른 말을 하다가 아주 신중히 끝날 무렵 대답했다)

  • 지금 처음 밝히는 것이지만, 그때 가족 간에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토지 매각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렸는데, 이것이 다툼으로 이어져 제가 가방 하 나들고 집을 나왔습니다. 가출한 셈이죠. 형제들 집으로 찾아가기도 그렇고 해서, 그분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힘들 때, 저를 돌 봐주신 그분께 지금도 감사히 생각합니다. 제게 참 잘해주었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식구들과 화해한 다음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와 관련 필자의 한가지 기억이 있다. 그 당시 김상현의 동생이 경영하는 ‘칠성부동산’ 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김칠성은 계약 건 때문에 안에 있었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뒤에 김칠성은 공증인 형수와 같이 나왔다. 그분이 가신 다음에 김칠성에게 물어보았다. 형님 사생활과 관계없이 전 형수와 같이 일하느냐고 했는데, 그때의 김칠성 대답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형수님에게 얼마나 은혜를 입었는데, 형님 하고는 관계없이 제가 잘 모셔 야지요”

-골프 실력도 대단하시고, 특히 그린에서 집중력은 놀라울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 제가 집중력과 열심히 하는 것은 있습니다. 골프도 배 운지 6개월 만에 한인골프대회에서 우승했고, 브라질에서 열린 남미대회에서도 챔피언을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브라질 남미대회에서 우승한 다음에 브라질 여성 챔피언 분에게 시합하자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남자가 물러서기도 그렇고 해서, 점심 내기 시합을 했는데, 여자분이 타도 엄청 길고, 실력이 정말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힘든 경기였지만, 제가 2타 차이로 이겼습니다. 아주 좋은 식당에서 대접 받았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아직 은퇴하시지 않았지요 ? 언제쯤 은퇴하실 생각입니까 ?

  • 저에게 은퇴는 없습니다.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 사업을 구상하고,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계속 사업을 할 생각입니다.

김상현과의 인터뷰에서 필자는 이야기를 들은 것보다, 많이 깨 달았다. 단아한 용모에 신사 같은 인상과는 달리, 목적이 있으면 무섭게 달려가는 실행력과 그에 따른 계획과 집중력도 대단했다는 점이다. 1945년 해방동이로, 2025년이면 80살이 되는 그는 아직도 사업을 구상하고, 그것을 성공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옆에서 봐도 그 집념이 느껴졌다. 나는 아들들이 가게 일을 하면서, 주 5일 정도 골프장에 갔었는데, 많이 비교되었다. 고백하건 데, 김상현과의 인터뷰는 내게 너무 힘들었다. 작은 산에서 등산을 즐기던 사람이 큰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꼴이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리 속에 폭풍처럼 휘몰아쳐서, 어떻게 정리할지를 몰라서 헤맸다.

인터뷰를 끝내고 헤어지면서, 김상현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의 손 힘은 희수가 지나고, 산수를 앞둔 노인이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은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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