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위안부의 날” 전쟁 시기 최대 조직적인 성노예 피해자들
8월 14일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피해를 수십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여성들이 증언을 시작한 날이다.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은 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일본이 일으킨 아시아 전쟁 당시, 자신은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 군인들에게 이끌려 갔다고, 처음으로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증언한 날이다.
그녀는 1945년 까지 체계적인 군영에 갇혀 있었고,
구타당했으며, 분노했다.
“군인들이 줄줄이 강간했다. 입술을 깨물면서 저항하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잡혀들어왔다. 일본군은 저를 끌고가서 계속해서 강간했다. 너무도 겁에 질려 가슴이 아팠고, 한마디 말도하기 싫었다. 나 스스로에게 ‘생각하지마’라고 했지만, 막상 생각할 때는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이런 사실을 내가 죽고나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없을까봐 두려웠다”라고 말했다.
일본제국주의 성노예 피해자 중 한명인 김학순이 증언을 했던 날 이후, 일본군이 전쟁 중 성노예 여성들에게 사용한 용어인 “위안부” 이야기는 영원히 바뀌었다.
성노예 피해 여성은 대략 20만명에서 40만명으로 추정되며, 이들의 출신 국가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 대만,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동티모르, 베트남,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거주 네덜란드 정착민의 딸) 등이다.
이들은 일본군의 조직적인 인신매매에 갇혀 성적 노예로 전락했다.
이런 일본군의 만행은 현대 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노예 여성들은 매우 어렸고, 대부분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이었으며 따라서 교육도 거의 받지못했다.
출신 국가에 따라, 거리에서 납치되거나, 거짓 직장 약속에 속거나, 이웃이나 친척에 의해 팔려가기도 했다.
모든 경우에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끌려왔고, “위안소”라고 불리는 납치 장소에서 성적 노예가 되었다.
그들은 하루에 최대 30명의 군인들을 받아야 했고, 군인들은 성적 학대 뿐만아니라, 구타하고, 굴욕감을 주거나, 심지어 고문을 했다.
그 시스템은 너무 악랄해서 의사들까지 피하기를 확인한 후, 치료보다는 콘돔 사용법을 가르치고, 강간도 행했다.
제국주의는 병사들이 전장에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건강과 사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여성들은 오직 전쟁에 대한 만족의 도구일 뿐이었다.

폭력의 일상화
전시 상황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예로부터 존재해 왔다.
이런 비정상적인 관행은 감추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유교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일상화가 되었다.
조직적인 강간, 고문, 수치심, 고통에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해 피해자들은 자신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알수없었다.
전쟁 후에도 사회는 그들의 말을 듣기를 꺼렸다.
그들은 좋은 딸,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될것을 요구받았다.
정신적으로 다치고, 신체도 정상이 아닌 그녀들은, 강제 입악음의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으려고 노력했다.
일본의 패배가 “위안부”에게 진정한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침묵을 깰 수는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날, 많은 사람들이 무슨일이 있었는지, 잊고 있을때 희생자들은 증언하기 시작했다.
김학순의 기자회견에 고무된 여성들이, 자신들의 진실을 증언하기 시작한 것이다.
희생자들은 일본과 네덜란드 여성을 포함하여, 일본이 점령한 모든 영토에서 여성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지만 모두 고통 속에서 해방을 위한 정치적 투쟁에 속해있는 자매였다.
김학순의 증언 이후, 한국사회 변화 뿐만아니라 국제적인 인권 관점도 바뀌었다.
여성단체들의 아시아에서 여성 인신매매 반대 캠페인 시발점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성폭력이 더이상 사적인 문제라고 믿지않았다.
이런 물결에서 남성주의자들 행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을 이해시켜야 했다.
성폭력은 사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성폭력은 남성주의자나 국가가 행한 여성들에 대한 폭력 행위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했다.
그래서 법적 조치와 시위 그리고 인식을 바꾸기 위한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정의는 결코 그들에게 찾아오지 않았지만, 엄청난 투쟁 끝에, 한국정부는 2018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사망했지만, 그들의 기억은 희생자들의 증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새로운 세대의 행동주의에 여전히 남아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위안부”는 여전히 살아있다.
첫 공개 증언이 있은지 33년 후, 지리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인들도 그것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 투쟁은 그들만의 투쟁이 아닌 우리 모두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평화의 소녀상

일본대사관 앞의 수요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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