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초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는 겨울 찬바람이 불고있었다.
영화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는 이 도시에, 며칠동안 얼음이 어는 기온을 넘나들고 있었다.
최운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 옆의 공원에 있는 비둘기들도 추위에 웅크린 모습이다.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두툼한 외투 차림에 옷에 달린 모자로 목과 머리를 감싸고 바람을 등지고 서있었다.
최 선생님과는 원래 한 주 전에 만나려고 했지만, 감기 때문에 미뤄진 만남이었다.
90년대 중반 문인협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 최 운 수필가의 모습은 단단하고 곧은 나무 같았다.
평생 병하고는 거리가 먼 그런 인상이 깊이 남아있었다.
그런 분도 세월 앞에서는 나이가 늘어나고 병이 찾아오니 시간의 무서움이 새삼스럽다.
“지나온 모든 어제들은 어리석은 인간에게 죽음을 보내고”라는 섹스피어 시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병으로 아픈 것이 아닐까?
죽음은 우리가 태어날 때, 우주와 신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약속했으니 큰 고통이 아닐지라도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에서 더 힘들 것같다.
최 운 선생님은 약속 장소에 미리 와 계셨다.
안부는 늘 들었지만, 몇 년 만에 직접뵈니 여전히 단단한 모습이었다.
– 여전히 건강하신 모습입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집사람이 돌아가고 난 뒤에 여기저기 안아픈데가 없어요.”
-자녀 분들과 손자들은 잘있는지요?
“이 선생도 아시다시피 우진이 (큰손자)가 결혼한지는 좀 됐는데 아직 증손자 소식은 없고, 결혼한지 얼마안된 서진이 (둘째손녀)가 아기를 가졌다고 해요.”
선생님의 큰아들이 필자의 앞집에 살았었다.
그리고 우진이는 필자의 큰아들과 동갑에 같은 학교를 다녔다.
최 운 선생님이 큰손자 이름을 제목으로 수필 “우진이”를 발표한 때가 1997년도였다.
-선생님의 이민 내력도 독특합니다.
“하하 무슨 역마살이 끼였는지 1986년에 이민 왔다가, 1989년 초인플레이션 폭탄을 맞고 1990년 한국으로 갔다가 1992년 다시 아르헨티나로 왔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역경이 선생님을 수필가의 길로 이끈 것같습니다.
“글은 재이민 다음 해인 1993년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역활을 못하는 사람의 탈출구 비슷하겠지요.”
최운 선생님이 문인협회장을 하시던 1998년, 필자는 총무로 같이 일했다.
이때 선생님의 글은 여러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필자도 그중의 한명이었다. 원래 시 쓰던 필자가 수필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님의 수필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은, 2013년 “오늘의 한국 대표 수필 100인선 (문학관)”에 실린 “바람부는 날의 산조”이다. 이 수필에서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1뻬소로 감히 벤스를 산다.”는, 버스을 타는 장면 묘사이다.
-선생님은 1997년도에 “에세이 문학”을 통해서 등단하셨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한국의 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셨는데, 요즘도 한국 문학지에 기고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집사람이 오랫동안 아팠고, 돌아간 이후에 저의 건강도 좋지 않아서 한국과 모든 연락을 끓었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선생님이 글을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도 선생님은 “수필 교실”에서 강의하시고, 듣는 분들도 있다.
-최운 선생님이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 50주년사”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이민 60년사” 편찬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많이 도와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올해 85세가 된 늙은이가 도울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이 선생의 실력으로 잘할 것으로 믿습니다.”
-문인협회 회원들도 그렇고 “이민 50년사” 편찬을 함께했던 많은 분들이 대부분 아르헨티나를 떠났어,
글을 쓰실 분들 구하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주위에서 같이 활동했던 분들이 돌아가시거나 한국으로 가셨어, 창작 자체가 전보다 많이 위축된 것같아 안타깝습니다. 이 선생이 많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현재 상황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문인협회 현 상황을 타개할 방안에 대해 제안을 했지만 답이 없습니다. 문인이라면 당연히 기개와 현실을 뛰어넘는 주장이 고집스럽게 있어야 합니다. 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도 처한 일 때문에 시간도 관여도 할 상황이 아닙니다.
최운 선생님과 필자의 대담은 여기서 끝났다.
90년대와 2000년대 활발했던 때의 문인협회 활동을 떠올리고는 두사람 다 침묵에 잠겼다.
까페를 나설 때, 선생님의 걸음걸이가 전과 같지 않았다.
“요즘 걸음이 불편하여, 겨우 집 근처의 공원을 산책하는 정도입니다.”
최운 선생님은 그날 “수필 교실” 강의가 있어서 가신다고 하셨다.
오랫만에 선생님의 수필 강의를 듣고 싶어 따라가려던 필지에게 한사코 못오게 하셨다.
“이 선생 같은 수준을 가진 사람이 들을 강의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20년 전에 했던 말씀과 똑 같았다.
신호등을 건너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서있었다.
거리는 남극 찬바람이 거세게 불고있었다.
“꿈속인 듯, 꿈을 깬 듯, 인생이 덧없다는 느낌만 가슴으로 밀려온다.
아베쟈네다 상가 위로 8월의 겨울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로스 안데스 16호, (2015년) 고 이헌영 선생님 영전에, 중에서
[최운 수필가 약력]
1939년 서울 출생
1986년 아르헨티나 이주
1997년 에세이 문학 등단
2005년 수필집 “까라보보의 참나무” 출간
2006년 제 24회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2007년 3인 수필집 “사람들 사이에 길이 있다” 출간
2009년 수필집 “바람 부는 날의 산조” 출간
그외 최운 수필가 작품이 실린 수필집
“한국의 명수필2” 2005년 을유문화사
“독자들이 뽑은 한국 명수필” 2009년 여울문학
“오늘의 한국 대표 수필 100인선” 2013년 문학관







참 읽기 좋았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