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신흥국의 통화와 신용: 아르헨티나 사례
※ 아래 내용은 도밍고 카발로(Domingo Cavallo) 전 경제장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도밍고 카발로는 2026년 8월 20일 아르헨티나 국립경제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취임을 계기로 발표한 글에서, 아르헨티나가 지속적인 안정과 성장을 이루려면 재정균형만으로는 부족하며 통화·외환·금융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카발로는 자신의 경제학 연구와 정책 경험을 돌아보며, 경제정책을 판단할 때 이론보다 실제 경제현상과 역사적·제도적 경험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반복적인 인플레이션과 금융위기의 근본적 문제 가운데 하나가 신뢰할 수 있는 통화와 장기 신용제도의 부재라고 본다.
신흥국의 과제
선진국은 이미 비교적 안정된 경제제도를 갖추고 있어 성장과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근본적인 제도 변경이 필요한 경우가 많지 않다. 반면 신흥국은 경제발전을 위해 기존의 경제·사회질서와 상당히 다른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특히 경제개방, 해외투자 유치, 국제무역 확대가 생산성과 성장에 중요하다. 그러나 해외 금융자본의 급격한 유입과 유출은 신흥국에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으며, 이런 위기가 발생하면 이미 시행한 시장경제 개혁까지 되돌려질 위험이 있다.
카발로는 2001~2002년 아르헨티나 위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 당시 위기로 1990년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성장 기반을 마련했던 통화·금융제도가 붕괴됐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통화제도가 환율제도보다 중요
카발로는 고정환율이 좋은지 변동환율이 좋은지를 논의하기 전에 어떤 통화제도를 채택할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신뢰할 수 있는 통화가 없다면 중장기 계약이 어렵고, 신용도 형성되지 않는다. 신용이 부족하면 가계와 기업의 투자는 자체적으로 축적한 저축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생산적 투자가 제한되고 경제성장이 정체될 수 있다.
반대로 자국 통화에 대한 신뢰가 높고 환율이 자유시장에서 형성되는 국가에서는 중장기 금융계약이 가능하고 중앙은행도 경기변동에 대응하는 통화정책을 펼칠 수 있다.
달러화와 신흥국
유로화를 도입할 수 있었던 동유럽 국가들은 유럽연합과 유로존 편입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통화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남미 등 대부분의 신흥국은 이러한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달러를 장기 금융의 기준통화로 활용해 왔다.
카발로는 달러화 정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칠레·멕시코·브라질처럼 대외 금융거래에서 주로 달러를 사용하는 제한적 달러화, 파나마·에콰도르·엘살바도르처럼 자국 경제 전체가 달러를 사용하는 완전 달러화, 그리고 아르헨티나·페루·우루과이·파라과이 등처럼 국내에서도 달러 표시 계약을 허용하는 중간 형태가 있다.
카발로는 모든 신흥국에 하나의 통화제도가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아르헨티나에는 ‘통화 선택의 자유’ 필요
그는 아르헨티나처럼 국민들이 오랫동안 달러를 저축과 계약 수단으로 사용해 온 경제에서는 달러 사용을 강제로 제한하는 것보다 페소와 달러가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페소의 완전한 태환성(convertibilidad)을 보장하고 달러에 법정통화에 준하는 지위를 부여하며 외환거래와 자본이동에 대한 제한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카발로는 1990년대의 태환제도 역시 본래 단순히 ‘1달러=1페소’라는 고정환율 제도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핵심은 국민들이 페소와 달러 가운데 원하는 통화를 자유롭게 선택해 거래와 계약에 사용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호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당시의 경험을 통해 고정환율을 지나치게 오래 유지하거나 국내외 신용팽창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금융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따라서 앞으로 필요한 제도는 ‘통화 선택의 자유’와 ‘유연한 환율’을 결합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외환규제 완전 철폐 주장
카발로가 현재 아르헨티나에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정책은 외환규제, 즉 이른바 ‘세포(cepo cambiario)’의 완전한 철폐다.
현재 개인에 대한 상당수 외환규제는 완화됐지만 기업에는 여전히 여러 규제가 남아 있다.
그는 기업과 수출업체가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중앙은행이나 공식 외환시장에 의무적으로 매각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해외에서 투자자금이나 금융자금을 들여오는 기업 역시 달러를 강제로 페소로 환전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반대로 중앙은행도 수입업체나 해외송금 수요자에게 의무적으로 달러를 공급해서는 안 된다.
즉 외환시장을 중앙은행 중심에서 벗어나 민간의 수요와 공급이 자유롭게 만나는 시장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필요하면 외환을 사고팔아 준비금을 축적하거나 줄일 수 있지만, 이는 통화정책상의 선택이어야 한다.
정부가 해외 부채나 수입대금을 지급하기 위해 달러가 필요하다면 재무부가 시장에서 직접 외화를 구입해야 하며, 중앙은행이 정부에 달러를 공급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환율도 시장에서 결정
이 경우 페소-달러 환율은 외환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중앙은행은 외환시장 개입이나 금리·지급준비율·공개시장조작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환율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카발로는 이러한 제도 아래에서는 고정환율, 점진적 환율조정(crawling peg), 관리변동환율, 완전 자유변동환율 등 다양한 환율정책을 선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외환 자유화가 신용과 투자 확대
카발로는 외환규제 철폐의 가장 큰 수혜자가 수출업체와 서비스 수출기업이 될 것으로 본다.
현재는 수출기업이 외화를 공식 환율로 환전해야 하고 이후 다시 해외로 자금을 송금하려면 별도의 제약이나 금융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그는 외환 자유화가 이러한 비용을 없애 수출기업의 실질적인 수익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외환 및 자본이동 자유화가 국가위험도(riesgo país)를 낮추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국가위험도가 하락하면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기업도 국제금융시장에서 더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해외 금융기관과의 경쟁이 확대되면 국내 페소 대출금리도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현재가 외환규제 철폐에 유리한 시기
카발로는 현재 아르헨티나가 상당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외환규제를 완전히 철폐하더라도 급격한 환율상승 위험이 과거보다 낮다고 평가한다.
반대로 외환규제를 계속 유지하다가 향후 무역흑자가 감소하거나 사라진 뒤 자유화에 나선다면 환율충격이 훨씬 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지금이 외환자유화를 추진하기에 상대적으로 좋은 시기라는 것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장기 신용 회복
그가 제안하는 개혁의 최종 목표는 단순히 외환시장을 정상화하는 데 있지 않다.
아르헨티나 국민이 국내외에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저축을 다시 국내의 중장기 신용으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민들이 정부나 페소를 신뢰하지 못하면 저축을 현금 달러로 보유하거나 해외로 이전한다. 이렇게 되면 그 돈은 국내 기업과 가계의 대출재원으로 활용되지 못한다.
따라서 달러 사용을 막는 것이 아니라 달러와 페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페소가 신뢰를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카발로의 논리다.
결론
카발로는 재정균형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르헨티나의 통화안정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보장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가 제시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재정적자에 대한 중앙은행의 화폐발행 금융을 금지하고, 페소와 달러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하며, 외환규제를 완전히 철폐하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며, 모든 금융계약을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또 중앙은행은 정부의 재정적자를 지원하거나 정부가 요구하는 달러를 공급하는 기관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통화정책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발로는 이런 제도가 정착되면 아르헨티나가 인플레이션을 낮추면서도 내수경기의 침체를 불필요하게 장기화하지 않고, 해외로 빠져나간 국민 저축을 다시 금융시스템으로 끌어들이며, 가계와 기업을 위한 중장기 신용을 재건할 수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재정균형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르헨티나에는 페소와 달러의 자유로운 경쟁, 외환규제 철폐, 자유로운 자본이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통화·금융제도가 필요하다.”
이것이 이번 글에서 도밍고 카발로가 제시한 핵심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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